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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Sep 09. 2024

03.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마음 건강을 묻다

뻔히 알면서 안 하는 일 3


  살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답답한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다. 누가 속시원히 답을 알려주면 좋겠지만, 남들이 '물으러 간다'는 곳에는 겁이 나서 가지 않는다. 괜한 소리를 듣고 나서 귀를 씻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요리도, 육아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글로 배우는 나는 그럴 때마다 명리학을 배워볼까 싶은 생각도 가끔 한다. (솔직히 독학해볼까 싶어 책을 읽어보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


  건강하냐고 물으면 흔히 몸을 떠올린다. 몸과 함께 건강의 주축을 이루는 마음 상태를 묻기 위해서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작가인 정혜신님은 <당신이 옳다>(해냄출판사, 2018)라는 책에서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물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 건강을 확인하라고 했다. 듣고 보니 몸과 마음이 모두 중요한데 늘 반쪽짜리 건강만 신경쓴 것 같아 그 뒤로 내내 마음에 남은 질문이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질 좋은 음식을 적당히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실천이 오락가락해서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너무 막연해서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 사랑이 뭔지도 말로 하기 어렵고, 허점 투성이인 나도 마음에 안 드는데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하늘의 별을 따다 줄만큼 너를 사랑해'라는 말처럼  둥둥 떠다닌다. 실천이 쉬울 리가 없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차라리 낫다. 너덜거리는 마음을 이어붙이는 것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일상을 낯설게 하기


  마음 챙김이니 자기 돌봄이니 하는 말들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요가 수행자나 종교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 같던 명상이 마음을 돌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게 널리 알려진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흔해진 만큼 뻔한 말이 된 느낌도 있다. 엄마의 잔소리처럼 또 그 소리야 하며 귓등으로 흘려버리게 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부정할 수 없지만 긍정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격언들이 오랜 세월 살아남은 것이 다 이유가 있을텐데, 너무 익숙해서 뻔한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한다. 낯설지 않아서 오히려 낯설게 보아야 할 판이다.

  ‘낯설게하기’는 문학 용어다. 너무나 흔하고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예리한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새로워진다. 분명 나도 보고 듣고 겪었을 법한 일들이 작가의 민감한 의식 과정을 거쳐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하면 문학이 된다. 간혹 책을 읽다가 우와, 이 작가 천재 아니야 하는 감탄어린 존경심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낯설게하기’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결심한다. 내 일상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낯설게 보겠다는 당찬 포부다.


  생뚱맞게 문학 용어를 들먹이는 것은 이 말이 내 마음을 돌보는 하나의 기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해본 일은 시작 전의 걱정과 불안이 점점 줄어든다. 내 일상에 들어온 많은 물건, 사람, 일도 처음이 낯설지 계속되면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이 되어 녹아내린다. 존재감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눈에 띄지 않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 

  가장 뻔한 예로 남편을 생각해본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옷차림에 어떤 느낌이었는지 오래되었지만 제법 생생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다. 남편과 함께 그때를 떠올리면 두 번, 세 번 만난 것까지는 서로의 디테일한 기억이 살짝 어긋나기는 해도 얼추 맞아떨어지니 낯선 존재였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억은 뒤엉킨다. 특별히 좋았던 순간이나 힘들었던 순간들이 점점이 이어지기는 해도, 나에게 낯설지 않은 사람이 되고 나면 일상의 평범함에 묻혀 버린다. 결혼을 기점으로 다시 확연하게 남편이 낯설어졌다. 분가와 새로운 가족 관계라는 일상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남편도 연애할 때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이 되었다. 신혼 초에 사소한 생활 습관 차이로 숱하게 말다툼이 있었던 것은 낯섦 때문이었다. 십수 년 같이 살면서 그것마저 일상으로 녹아내리니 남편의 존재감은 약해졌다. 내 기분따라 괜찮았다가 성질이 났다가 변덕이 생길 뿐이다. 늘 곁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탓이다. 언젠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죽게 되면 남은 한 사람은 그제서야 존재감을 크게 느낄 것이다. 그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텐데 왜 진작 소중함을 알지 못했나 한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뻔한 것을 낯설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서 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대부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옛날 사람. 소싯적 내가 좋아하던 이상은의 ‘언젠가는’이라는 노랫말에서 그랬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그 맥락에서 보면 똑같다. 매일이 젊은 날이라서, 사랑이 늘 옆에 있어서 모르고 못 보았듯 늘 나로 살아와서 내가 나인 줄 모른다. 내가 익숙하고 당연한 모습으로 일상에 녹아내려 존재감이 약해진 것이다. 나를 잃고 나서 후회할 텐가? 나를 잃는다는 건 죽음인데 그땐 후회할 기회조차 없다. 그러니 지금 나를 낯설게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심리학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면 자기 안의 내면 아이를 발견하고 위로할 줄도 알고, 거기서 비롯된 왜곡된 인식이나 관계맺음을 깨닫고 달라지려고 노력도 한다. 앎이 가지는 힘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도 없고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온 나는 책에서 읽는 것처럼 자아 발견이나 상처 치유라 할 만한 극적인 순간이 없다. 가끔씩 겪는 우울함과 소심함을 두고 어설픈 지식을 들이대어 없는 상처를 만들거나 유년 시절의 환경을 탓하는 오류에 빠질 수는 없다. 

  딱히 힘들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을까. 삶을 뒤흔드는 위기도 없고,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면서 소소하게 투닥거리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주기적으로 우울감이 찾아오는 걸까. 그런 마음을 짚어주는 책을 만났다. <스몰 트라우마>(멕 애럴 지음, 박슬라 옮김, 김현수 감수, 갤리온, 2023)가 그것이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큰일도 아니다. 이유가 뭔지 딱히 짚지도 못하겠다. 그런데 왠지... 이상하게도... 기분이... '바닥이다'. 뭘 해도 감흥이 없고, 늘 과소평가받는 느낌이고, 별로 사랑받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가족과 그럭저럭 괜찮은 직업, 좋은 친구들이 있다. 먹고살기에도 충분하고 머리 위에는 튼튼한 지붕이 있고, 주변 사람들도 착하고 따뜻하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단계설에 비춰 봐도 잘 살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왠지... 행복하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그 '행복' 아닌가?(p.8 서문 중)     



  내가 딱 그런 상태였다. 넘치는 여유는 없지만 딱히 부족하지는 않다. 우울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이유는 답할 수가 없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행복'처럼 두루뭉술하고 사람을 헛헛하게 만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나처럼 어느 정도는 마음을 숨기고 살고 있지 않을까? 매일 얼굴 맞대고 사는,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는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말 못하는 속내가 누구나 있지 않나? 

  오랜 연구와 임상경험을 한 저자는 그 이유를 '스몰 트라우마'에서 찾는다.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작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활력과 열정, 잠재력을 고갈시키는 것 역시 작고 일상적인 일이다'라며 스몰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간과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심리치료를 받지 않아도 다시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팁도 알려준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마음챙김과 관련된 다른 책들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수없이 찾을 수는 있지만, 저자의 솔루션대로 따라 하면 돈 안 들이고 심리치료를 받는 효과를 느낄 수 있으니 고마운 책이다.



글로 배우고, 글을 쓰는 이유


  부정적이거나 왜곡되고 억압된 사고를 인식(Awareness)하고, 이를 수용(Acceptance)하고, 원하는 삶을 만들어나가는 행동(Action)을 하라는 단순한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걸리고,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며, 없는 일인 듯 살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어야 하는 불편함도 뒤따른다. 그래도 지금보다 나을 수 있다면 작정하고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마음챙김을 위해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은 제대로 덤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내 마음은 내가 잘 아는 것 같아서, 혼자 분석하고 처방내린 지난날의 서툰 시도들을 다시 하려니 생각만으로도 지쳐서 눈으로만 설렁 읽고 말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사를 찾아갈 용기가 없고, 그럴만큼 우울이 심각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나처험 혼자 책읽고 궁리하는 셀프 '독서치료'도 가능하다. 다만 여기에는 읽기만 하지 말고, 뻔한 것 같아도 직접 써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을 쓰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지겹도록 들어온 책읽기와 글쓰기의 효용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언제 어떤 마음의 문제라도 이런 방법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을 지키는 마음 근육을 키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일깨우는 것은 나에게 읽기와 쓰기였다. 그러니 숱하게 들어본 방법이라 뻔하다 싶어도 다시 해보기를 권한다. 효과를 얻고 싶다면, 자신을 속이지 말고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나에게 숨겨진 스몰 트라우마를 찾아내는 것이 저 책이 주는 숙제다. 

  책 읽고 나서 숙제라니,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어른들이 시키던 것, 책읽고 독후감 쓰기의 재현이다. 뻔한 것이 뻔해진 이유가 있다. 하면 좋기 때문이다. 마음챙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껏 챙기고 보듬어 편해진 마음도 어느 한순간에 다시 흔들리고 무너지는 게 삶이다. 그러니 뻔한 일일수록 자꾸 되풀이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앎은 삶으로 스며들고 진정한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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