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돌봄의 시간, 그 사이
누구를 돌보는가?
돌봄이라는 글자만 봐도 쏟아 놓을 게 한 무더기다.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다면 “아이가 몇 살이에요?”라는 물음의 답만 들어도 상대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고, 지금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오래전에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고, 여자는 애를 낳아 키워보면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얘길 들었다. 요즘은 군대도 육아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 말에 공감한다. 애 둘 키워보니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이 별로 없다. 그 입장이 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경험의 폭이 넓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겪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이랄까. 내공까지 운운할 만큼 아이를 돌보는 일은 고단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가장 공감했던 말은 ‘낮버밤반’이라는 낯선 단어였다. 많은 초보 엄마들이 돌봄에 지쳐 낮에는 아이에게 버럭 감정을 쏟아붓고, 밤이 되면 낮에 내가 왜 그랬을까 반성하게 된다는 육아계의 은어다. 자면 깨우고 싶고, 깨면 재우고 싶은 시기의 아이는 가만히 누워서 엄마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잠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배아파 낳은 기억은 다 잊고,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싶을 만큼 신비로운 존재감에 세상 시름은 다 잊는다.
그러던 것도 한 시절, 말문이 트고 미운 짓도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불쑥 감정을 쏟아냈던 적도 많다. 아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매일 되풀이되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육아를 견뎌내지 못하는 나 때문이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물론이고, 내가 이렇게 감정 조절이 힘든 사람이었나 싶은 한계를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은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땐 너무 힘들어서 작은 일에도 꼬이고 꼬인 마음의 가닥이 한 올씩 끊어지면 감정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애증의 관계, 남편과 아이라는 가족에게 말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 쉬어가기
어느 아이를 키우든 힘든 육아지만 제법 키워놓고 보니 하나를 키우는 것보다 둘이 오히려 더 수월하다 느낀 것은 상황을 버텨내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쓰면 쓸수록 단단해지는 근육처럼 마음 근육도 단련할수록 단단해진다. 아이가 뭔 투정을 부려도 그맘때 다 그렇지, 하고 예사로 넘겼다. 받아줄 것과 단호하게 가르칠 것의 경계도 첫아이 때보다 분명해졌다. 그럴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셋째가 있었다면 아마 ‘셋째는 발로 키운다’는 말을 실천했을지도 모른다. 몇 명의 아이를 키우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를 키우더라도 그 상황을 잘 견뎌낼 몸과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처음은 처음이라 힘들 수밖에 없지만, 미리 다져놓은 체력과 바닥을 치고 오르내리는 마음을 돌보는 자기애가 조금 더 있었다면 육아가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밤이 되면 반성 모드로 들어가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내 마음이 쉴 틈을 만나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아이와 씨름하며 보낸 하루 끝에서 몸은 지쳤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나를 돌아볼 여유를 준다. 아이를 재우다 보면 열이면 열 아이보다 먼저 잠이 드는 시절이었다.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나 씻고 밀린 집안일을 할 때면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편했다. 얼른 일을 끝내려고 그 밤에도 종종거렸던 것은 다시 잠들기 전에 조금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지나고 나니 그 시간들이 더 잘 보인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육아가 아니라, 나를 돌볼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육아의 목표는 아이의 독립이라고 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엄마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신체적 독립은 아이가 혼자 목욕을 하고 화장실 뒤처리를 하면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심리적 독립은 더 오래 걸리지만, 사춘기가 찾아와 까슬까슬해지는 아이와 언쟁을 하다가도 이제 육아 독립이 머지않았다는 작은 희망으로 참기가 수월해진다. 북한군도 무서워한다는 중2를 지나기까지 험난한 과정은 익히 들었지만, 나도 그간 아이와 함께 컸다.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기에 아이와 적당한 거기를 두고 지켜볼 여유가 생겼다.
사춘기 때는 사실 엄마보다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더 크다. 내 속으로 낳았어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춘기 몇 년만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자신의 주체못할 감정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처음 겪는다. 그 마음이 어떨지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으면 아이를 돌보는 마음에 내공이 생긴 거다.
삶을 전지적이되 참견적으로 바라보기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 일에 왜 그리 동동거리며 아이를 재촉하고 다그쳤는지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아쉽다. 할머니들이 손주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것은 그런 경험을 똑같이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리사랑은 그저 생기는 게 아니라 겪어봐서 아니까 생기는 여유로운 마음이다. 아이의 말도 안 되는 투정과 요구에 하루에 수십 번 솟구치는 감정을 억눌러야 겨우 성숙한 어른 흉내를 낼 수 있는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인생을 더 길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는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의 내가 십 년 전을 돌아보고 나를 안타까워하듯 십 년 뒤의 내가 지금을 돌아보면 지금이 달라 보일 것이다. 사소한 일에 너무 크게 감정이 휘청거리거나, 아이의 성취가 내 것인 양 더 잘하기를 바라며 조바심 내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아는 미래의 나를 떠올려 본다. 어영부영 하다가 일 년이 가고 십 년이 가고, 그때 어떤 기분이 들지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내 일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넓혀야 한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 제목처럼 전지적이되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참견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내 마음을 돌보는 방법이다.
매일 쫓기는 기분이 들 때 읽는 책
아직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돌봄의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다가올 아이의 사춘기도 걱정되고, 내 갱년기도 걱정된다. 부모는 둘인데 그런 돌봄이 오롯이 내 몫이라는 걸 떠올릴 때마다 화와 체념이 동시에 오가며 내 마음만 심란해진다. 아이 둘 키우는 일이 돈 벌어 오는 노동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힘든 일이 아닌데, 전업주부는 먹고 치우고 입고 빠는 도돌이표 집안일까지 당연한 듯 해야 한다. 그 에너지로 돈을 벌었으면 어깨에 힘이라도 들어갈 텐데, 무임금 가사 노동을 십 년 넘게 하고 나니 어깨 근육통만 남았다. 가족 안에서의 돌봄 노동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집안일과 아이 키우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업주부의 삶에 억울할 때가 많다. 나만의 시간과 경제력이 그립기도 하다. 그럴 때 나에게 논리적이고 명쾌한 언어로 여성, 돌봄 노동, 시간에 대해 통쾌함을 안겨준 책이 있다. <시간을 읽어버린 사람들>(테레사 뷔커 지음, 김현정 옮김, 원더박스, 2023)이 그것이다.
독일인 저자 테레사 뷔커는 두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저널리스트다. 책의 앞부분에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잠깐 일을 그만두었을 때 학부모 모임에서 자기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던 경험을 통해 노동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깨달았다. 직장이 없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돈벌이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하루종일 바쁘게 일하는데 자신을 드러낼 만한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이다. 전업주부라고 말하기엔 자신의 경력을 하나도 드러내지 못해 남들에게 무능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 같은 불안함도 함께 고백한다. 그 지점에서부터 공감이 시작되었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나는 매일 바쁘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지만 보수가 없는 내 가사 노동 덕에 가족들은 회사와 학교에 다녀오고, 집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이 쉴 때 나는 더 바빠진다. 주말을 생각해 보라. 각자 자기 시간을 보내다가 때가 되면 먹고 씻고 쉰다. 나는 먹기 위해 장을 보고, 식사 준비와 먹은 후에 설거지를 하는 걸 두세 번 반복하고, 가족들이 벗어둔 옷을 빨고 그 전에 빨았던 옷을 정리한다. 아, 청소를 빼먹을 뻔했다. 주말에 하는 화장실 청소를 빼놓고라도 매일 하는 일상적인 청소는 주말이라고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 아무리 손에 익었다 해도 모두 ‘나의 시간’이 드는 일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가족 안에서조차 불평등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나도 먹어야 하고 빨래를 해야 하니 품이 조금 더 들어도 같이 할 수 있다. 문제는 가족들이 내 시간과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나를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기를 흔들어 재우는 것은 일인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은? 슬퍼하는 친구가 걱정거리를 이야기할 때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것을 일로 보아야 할까? 우리는 지금까지 일을 다르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돌봄을 일로 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돌봄은 '시간을 쓰는 일'이라는 점이다. 돌봄 업무로 보내는 시간은 잔디밭에 눕거나 글쓰기를 배우거나 친구와 극장에 가거나 뉴스를 듣거나 박사 학위 논문을 쓰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일하거나 이 책을 읽는 등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는, 다른 곳에서 끌어온 시간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고,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돌봄을 시간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만큼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활동은 없다. 돌봄은 자신의 시간을 타인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p.143)
가족, 특히 아이나 늙고 아픈 부모를 돌보는 데 필요한 노동과 인내와 시간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오로지 나를 위한 휴식과 자유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내 돌봄 노동에 대한 가시적인 인정이나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만족할 만한 대책은 없다. 그러나 내가 당연히 해 오던 일에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를 명쾌한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책을 읽는 즐거움은 놓칠 수가 없다.
혹시 지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당연한 듯 떠맡겨진 육아와 가사에 지쳐있는가? 아니면 매일 직장에 다니며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오롯이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내기 어려운가? 여유는 커녕 긴 투두 리스트를 해치우느라 늘 시간에 쫓겨 동동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일상의 쳇바퀴를 벗어나 일탈하고 싶은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가? 그런데도 답이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가?
분명 시간이 없겠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이 책을 책읽기를 권한다. 개별적인 상황에 대해 해결책을 마련해주지는 못해도, 돌봄으로 시작해 양극화, 과로, 저출생, 기후 위기,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문제가 어떻게 시간과 연관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데 그 이유를 몰랐던 많은 일들이 시간을 매개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내 마음을 대신해주는 구절들에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돌봄의 틈새 찾기
돌봄은 온 마음이 휘둘리는 일이다. 성인 자녀를 둔 선배맘들은 자식들이 시집 장가갈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걱정이 많다고 한다. 아직 그걸 겪지 않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로렌스 스타인버그 지음, 김경일, 이은경 옮김, 저녁달, 2024)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부모가 된 이상 죽을 때까지 자식을 돌보는 에너지를 장착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가 크면서 물리적 역할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 제 인생을 살아가려고 품을 떠나는 아이의 빈 자리와 남은 시간의 허전함이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 쓸모가 다 한 것 같은 공허함도 밀려온다. 그걸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빈둥지 증후군을 앓는 사람도 제법 많은 모양이다. 헌신적인 엄마들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돌보던 치열한 시간에 점점 틈이 생기면서 나타나는 감정이다.
애타게 기대하던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아이들이 품안에 있을 때, 늘 바쁘고 시간에 쫓긴다고 여겨질 때 오히려 시간을, 그리고 내 삶을 더 넓게 조망해야 한다. 돌봄의 양상이 변하듯 내 마음과 일상도 변할 테니 그 여백을 무엇으로 채울지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제대로, 잘,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삶의 여유이고, 쉼이다. 나를 위한 틈새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자. 쉬는 것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앎이 삶에 스며드는지 관찰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좀 쉬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