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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Sep 13. 2024

07.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군지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자아정체성, 청소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흔 넘어 자아정체성이라니. 사춘기도 아닌데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 

  그렇다. 해야 한다. 사춘기를 지나 청년기 즈음에 나라는 사람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으나 그걸로 평생을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 이 나이쯤 되니 제한적인 경험과 현실적 책임감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진 나라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답하다. 그뿐인가, 지금껏 내가 알던 나는 모두 외부의 시선들에 의해 평가되고 규정된 어떤 사람일 뿐이다.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뭘 새삼스럽게 정체성 타령이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이유는 있지만 남들이 알아듣기 쉬운 간단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추기의 감정 기복은 모든 문제가 '나'로 귀결되는 것 같다. 어릴 때 부모님의 삶을 보며 중년 이후를 그렸지만, 더 이상 그때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아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잘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가 없다.


  벌써 30여 년 전에 형성되기 시작했을 그 정체감이라는 것이 실은 좀 뜬구름 같은 단어다. 내가 누군지 보이는 것 같은데 막상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기는 어렵다. 학창 시절에 수시로 요동치는 감정을 겪으면서도 정체성이라는 것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았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멋진 수식어로 부모님과 학교의 안전지대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사춘기의 특권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중년에 겪는 정체성 고민에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허상만 쫓은 기분이랄까. 정체성이 흔들릴 때 ‘갱년기’까지 찾아오면 그야말로 수렁에 빠지는 꼴이다. 매일이 똑같고, 딱히 재미있는 일도 없다. 취미라도 가져볼까 싶어도 이건 이래서 흥, 저건 저래서 흥, 열정이 없으니 만사에 심드렁하다. 뭔가 해보자고 결심했던 마음이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되기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지치고 시들어간다. 우울감이다. 나는 어쩌다 이런 어른이 되었을까, 괜한 자괴감에 빠진다.

  둘러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겉으로 봐서는 다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마음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걸 느낀다. 그때의 안도감이 내 불안을 잠시나마 잠재운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그런 소통의 중요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험이 주는 힘을 믿기


  어릴 때는 세상에 나밖에 안 보인다. 세상 보는 눈이 딱 그만큼 좁기 때문이다. 세상 좀 겪어보니 사람 사는 모양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쳇바퀴 도는 일상이 지루하고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내 딴에는 겪어봐서 잘 아니까 시행착오는 줄이고 저 잘 되라고 아이에게 하는 말이 늘어난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에게는 모두 잔소리일 뿐, 돌아오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 뿐이다. 그래, 겪어봐야 알지, 더는 말을 말아야 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는 그때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거다. 시들해진 중년의 일상을 넋두리하는 나에게, 하고 싶었는데 못해봤던 일에 도전해 보라거나 나가서 운동이라도 하라는 조언들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뻔한 소리인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몸은 일상에 붙박아 둔 채, 머리로만 새롭고 멋진 인생 후반전을 꿈꾸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픈 마음 때문이다. 절박했던 기억이 딱히 없는 걸 보니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좋은,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러기에 굳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무모한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던 거다. 머릿속에서만 행동하고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 보고 그냥 포기해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인생 별거 없다는 냉소에 빠지는 것도 어쩌면 무난하게 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다. 

  자기 계발서를 아무리 얽어도 열정과 목표는 남의 얘기인 듯한 것도 어찌 보면 안주하려는 마음 때문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지만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못할까 봐 이만하면 괜찮은 거라며 현재를 긍정하고 만다. 

  남들의 성공과 내 성공은 그 모습이 다르다. 성공하는 방법 역시 숱하게 많지만 모두 내 것일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삶과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양보하고 적당히 회피하면서 그럭저럭 살아온 지금까지처럼 살지 않으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 시작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페터 베르 지음, 장혜경 옮김, 갈매나무, 2024)를 읽었다.



진정한 인간됨은 자신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저 바깥세상뿐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 감정을 인지할뿐더러 그것들을 의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자가 누구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p.171)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 왜 책을 읽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뻔한 앎에 대해 고민할까? 왜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가지고 답 없는 글을 쓸까? 먹고, 자고, 입는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무난하게 살면서 왜 자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가지고 살까? 읽고 쓰는 일이 혼자만의 만족일 뿐인데 왜 나의 언어에 한계를 느끼며 답답해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대체 누군가?

  질문을 하자면 끝이 없다. 그 모든 질문은 내 생각, 감정, 행동에 관한 것이다. 그런 물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나라는 걸 의식하는 순간, 나는 또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궤변 같지만 결국 '나'에서 출발해 '나'로 돌아온다. 그 도돌이표 안에서 방황하지 않고 나를 들여다보는 '인식'과 '의식', 페터 베르는 그 방법을 명상에서 찾는다.

  명상을 권하는 책이지만  저자는 진리를 깨우친 고승도 아니고, 영적 믿음으로 초월 세계를 갈구하는 신앙인도 아니다. 그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자신을 몰아세우던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나를 모르기에 타인의 생각대로 살아온'(p.179) 자신의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세우기를 멈추는 용기를 배울 수 있다. 역할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상을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그저 '온 감각, 온 집중, 온 알아차림을 동원하여 현재의 순간에 닻을 내릴 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고 오직 현재만 남는다'(p.185)는 저자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길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계속 물어야 한다      


  자꾸 미래를 위해 잘 살 궁리를 하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날의 나를 살핀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굵직한 일들 사이로 기억나는 일화들을 떠올려본다. 잘한다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었던 순간, 남들에게 떠벌릴 정도는 아니지만 혼자서 내가 해냈다며 뿌듯해하던 일, 혹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떠올려본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꾸준히 해온 것이 뭔지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즐기는가’하고 질문을 바꾸어 보는 거다. 돌아서면 까먹는 일이 일상다반사니 간단하게 적어보는 것도 좋다. 생각만 하면 내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게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적다 보면 생각보다 특출 나지 않아도 내가 할 줄 아는 게 꽤 많다. 어쩌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마음도 작게 일렁인다. 두루뭉술한 생각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단어들을 대하는 마음은 다르다. 자기 계발서에서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빈 줄을 그어놓고 질문에 답을 적어보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이렇게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흐르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자신감이 떨어질 때는 내부 비판자에 의해 가차 없이 지적당한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잘하는 게 아니라거나, 진짜 좋아하는 거였으면 그때 그렇게 그만두지 않았겠지 같은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한다. 

  그 순간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중요하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어떤 상황에서 자신감이 생기는지, 어떤 상황에서 머뭇거리는지 자꾸 물어야 한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출장을 자주 다니면서 기차의 몇 번째 객실, 몇 번 자리가 좋았는지도 메모를 해 두었다가 다음 출장 때 그 자리를 찾아 예매를 한단다. 사소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작은 행복감을 자주 느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질문을 다양하게 변주해서 순간의 감정까지 알아차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 부러웠다. 


  지금 내 감정, 생각,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현재의 조건과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일, 뭐든 좋다. 자꾸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적다 보면 어느 순간 이리저리 엮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손으로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는 게 좋다든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긴장해서 목소리도 떨리지만 소수의 몇 명과 있을 때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을 잘한다든지,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 될 때 기분이 좋다든지 하는 자기만의 특징도 알게 된다. 

  그렇게 질문으로 탐색하고 얻은 나에 대한 정보는 소중한 데이터가 된다. 강점을 발견하는 근거가 되고,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지 방향을 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청년 시절만큼의 절박함과 열정이 없어도 괜찮다. 이제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가늠하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 가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아니라 내가 찾는 나의 모습이 거기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고아처럼 기댈 곳 없다는 외로움이 수시로 찾아올 때, 갈곳 모르는 막막함으로 울적해질 때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 것인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까? 죽기 전에 한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데 아쉽고 후회만 가득하지는 않을까? 그런 질문은 돌고 돌아 지금 나에게 돌아온다. 지난날의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떤 가치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내가 원하는 삶을 살다가 죽으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구체적인 질문들로 일상을 채워나가다 보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일은 나를 돌보는 일이다. 가족 그 누구보다도 나를 돌보는 일이 가장 앞서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떠난 가족들 뒤에서 혼자 흔들린다. 상실감에 슬퍼하고 정체성 위기에 혼란스럽다. 나를 돌보는 일을 이제는 미루지 않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물으면서 나는 나를 의식한다. 나를 알아가는 일은 곧 내 삶이 된다. 앎이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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