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삶이 아니고 죽음인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자기 생각을 점점 강하게 굳혀가는 경향이 있다. 확증편향이다. '한국 사회 및 성격 심리학회'가 2024년 한국 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확증편향을 선정했다고 하니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개념인 모양이다.
부주의 맹시라는 것도 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내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는 심리학 용어다. 농구공 패스 횟수를 세느라 눈앞에 덩치 큰 고릴라가 버젓이 지나가는데도 못 보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다. 모두 내가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전자시계를 볼 때 11분, 22분, 33분처럼 같은 숫자로 된 시각을 유난히 자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이 있는가? 사고 싶은 옷이 있을 때 길을 걷다 보면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 적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어떤 것을 처음 알게 된 후에 그것을 더 자주 보거나 알아차리게 되는 인지적 편향을 '빈도 환상(frequency illusion)'이라고 한다. 관심이 생긴 대상에 대해 인지적 민감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평소와 비슷한 정도로 노출되더라도 더 눈에 띄고 기억에 남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게 심리학의 설명이다.
남들은 다 보는 걸 나만 못 보고 지나치거나,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 눈에 들어온다면 주목해 볼 일이다. 내가 요즘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중요한 힌트가 된다. 엄마를 잃고 내 눈에는 ‘암, 죽음, 호스피스, 조력 사망’ 같은 단어들이 수시로 눈에 띄었다. 모바일 뉴스 화면을 주르륵 흘려보내도 그런 단어가 들어간 머리기사 앞에서 멈추고, 숱하게 훑었던 도서관 서가에서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죽음 관련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내 관심은 온통 죽음을 향해 있었던 거다.
세상에 죽음과 관련된 책이 그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의사들의 에세이는 물론이고, 죽음에 대한 철학적 담론부터 잘 죽는 법에 대한 것까지 그 내용도 다양했다. 그간 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어쩜 그리 남의 일 마냥 모르쇠로 일관하고 살아왔는지 의아할 정도다.
후생유전학과 뇌과학에 대해 설명하는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2)라는 책에서 읽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가진 깊이를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에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관심은 뇌의 인지적 민감성을 강화시켜 세상에 널린 관련 정보들을 끌어모은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내 방식으로 해석되고 머릿속에 오래가는 기억으로 저장된다. 죽음도 그런 방식으로 내 의식 속에 들어왔다.
죽음의 역설
죽음과 관련된 책들을 읽다 보면 누가 썼든, 주제가 무엇이든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가 뻔히 아는 내용이다. '우리 삶은 유한하다. 그걸 알면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살 수 있다. 죽음은 삶과 분리할 수 없다. 삶의 끝에서 당연히 맞이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지금 살아가는 시간이 영원할 리가 없다. 죽음은 그 끝을 일컫는 이름이다. 선을 하나 그어 놓고 그 처음에 점을 찍고, 가운데 어디쯤 점을 찍고, 끝에 점을 하나 찍어 보자. 세 점은 모두 한 선분 위에 있다. 선분의 이름을 삶이라 하면 첫 번째 점은 탄생, 가운데 점은 지금, 끝의 점은 죽음이 된다. 세 점 모두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시간 차이와 그다음에 남는 시간의 유무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삶과 죽음은 반대말처럼 여겨진다. 삶에는 무한한 찬사를 보내면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정이라도 타는 것처럼 꺼린다. 삶이라는 연속적인 시간, 그 모든 순간은 삶이다. 죽는 순간까지 의미 있고 존중받는 삶이어야 한다는 걸 남의 얘기 듣듯 무심코 흘려버린다.
지금 해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성취해야 할 것도 많아 언젠가는 죽는다는 너무 뻔한 진실을 잊고 산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는 법. 중년은 전 생애를 놓고 봐도 가장 바쁘고 정신이 없는 때다. 내 몸 하나 건사한다고 끝이 아니다. 위아래 세대를 모두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때라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할 엄두가 안 난다.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닌 데다 겨우 한숨 돌릴 만하면 또 일이 생긴다. 현재의 삶에 너무 함몰되어 있어서 죽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럴수록 죽음을 인식하고 때론 공부가 필요하다. 잘 살기 위해 잘 죽는 법을 생각하고 준비하기, 그것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에서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점이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려면 살아온 날들에 만족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내가 할 만큼 하고 나면 그 결과가 어떻든 아쉬움이 없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충분하고, 실패해도 할 만큼 했으니 그 이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결과를 수긍하게 된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충실하게 살았다면 삶의 흔적들이 어떻든 간에 아쉬움이 덜할 것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보다 더 열심히 하기 어려울 것 같이 살면 된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말하길 삶 전체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매 순간을 할 수 있을 만큼 살아내면 된다. 마감 시간이 있으면 지지부진하던 일도 어떻게든 하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마감 시간을 염두에 두면 어떻게든 이 삶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결심이 생긴다. 죽음이 우리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들은 모두 역설적이게도 삶을 강조한다. 아버지를 잃은 영국의 호스피스 의사도, 어머니를 잃은 미국의 작가도, 의료조력사망을 돕는 캐나다 의사도 모두 죽음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마땅한 삶을 이야기했다.
나의 죽음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알프레드 노벨은 노벨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폭탄 제조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다이너마이트의 파괴력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노벨은 죽음의 상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가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여 노벨상이 만들어지면서 노벨은 착한 부자로 이미지 변신을 제대로 했다. 노벨이 처음부터 기부를 위해 그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은 아니다. 죽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노벨이 기부를 결심한 이유다. 노벨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를 보고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 형의 이름을 잘못 적은 오보였지만, 자기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확인할 수 있는 극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지가 미래를 보여주는 유령을 만나 자신의 죽음 이후를 목격한 뒤 개과천선한 것과 같다. 이야기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노벨에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은 두 인물의 이야기는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든 비슷하다. 그들의 변화는 모두 죽음이 주는 교훈 덕분이다.
자기가 언제 죽는지 알려주는 상자가 있다면 그것을 열까 말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수명을 알 수 있다니 궁금하긴 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짧은 수명이 나오면 겁이 날 것 같다. 언젠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언제든 죽음은 꼭 겪게 될 일이니 남은 수명을 알면 그때까지 좀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소설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니키 얼릭 지음, 정지현 옮김, 생각정거장, 2023)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자를 열어본다면, 그리고 그 끈이 짧다면 아무리 굳은 각오를 하고 열었어도 곧 죽는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긴 끈을 받았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길이는 수명을 의미할 뿐, 끈이 길다고 건강한 삶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모한 행동을 하다 장애를 입고 힘들게 장수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짧은 끈이 불행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예정된 죽음의 시간을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 미루어두었던 진짜 원하던 삶을 살아볼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늙어서 죽는 게 아니니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지 몰라 불안하고 두려울 수는 있다는 점만 빼면 짧은 끈을 확인할 가치는 그걸로도 충분하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는 이 상자를 열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 죽음 역시 처음 겪는 일이라 막상 그 앞에서는 두렵고 긴장될 것이다. 언제고 죽는다는 게 불변의 진리라면 굳이 불안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다. 불시에 그때가 다가와도 이미 죽을 걸 알고 있었으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나중에 (무엇을 이루면) 하겠다'며 미루기만 하던 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지금 하자는 마음이 생기거나, '할까 말까' 망설이던 일을 결과 따위 좀 나쁘면 어떤가 죽으면 그만인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시도해 볼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 두려웠던 죽음이 오히려 용기를 준다.
죽음 공부
나처럼 어른 고아가 되었다면 죽음을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도움을 준다.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큰 슬픔과 상실감을 느끼는 사건이지만, 그 실존적 경험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의지하던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돌봄이 끝난 후의 허탈함, 뭘 하든 결국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주의와 무기력감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책을 통해서 공감받고 위로받는 것도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움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감정들을 충분히 표출하는 것이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할 일이 아니라는 배움을 죽음 공부로 얻었다.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양가감정을 느끼던 한 미국 작가는 <어머니를 돌보다 MotherCare>(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 2023)라는 책에서 돌봄 과정의 노력과 치료를 위한 의학적 선택의 어려움, 돌봄으로 자기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는 것을 속상해하는 죄책감, 상실 후의 슬픔 같은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마음의 병을 해소한 모자 장인처럼, 죽음의 과정을 겪으면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내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상처 입은 나 자신을 돌볼 수 있다.
남들도 나와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면 공감의 여지도 확대된다. 머리로만 이해하던 남들의 슬픔을 마음 깊이 공감하며 위로해 줄 수 있는 마음 그릇도 커진다. 엄마를 잃은 이들과 스스럼없이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연대감은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슬픔을 겪고도 자기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실감에 주저앉아 울지만 말고, 내 죽음을 의식하며 지금 삶에 더 애정을 가져야겠다는 성장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죽음 공부로 나는 남들의 많은 죽음을 간접 경험하고, 그것을 지혜롭게 수용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배움을 얻었다.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고, 내 죽음을 상상하면 걱정과 불안이 교차하지만 그래도 굳건히 매일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은 죽음을 공부한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