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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Sep 20. 2024

09.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후회와 불안 사이

  후회는 많지만,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마음 노동을 꼽으라면 후회와 불안이 아닐까 싶다. 

후회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같은 뒤늦은 자책은 마음에 생채기를 만든다. 지나치면 머릿속에서 지나간 상황을 그대로 다시 재현하면서 내 말과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보인 반응을 곱씹기도 한다.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무슨 실수를 해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 아닐까’처럼 정답을 확인할 수 없는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남에게 더 좋은 인상을 주고 싶고, 더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자꾸 과거를 들춘다. 지난 일을 자꾸 떠올려본들 이로울 게 별로 없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과거를 향한 대부분의 생각은 지금 와서 어찌할 수 있는 게 없거나 확인할 수 없는 상대방의 마음이다. 바꿀 수 없는 지난 시간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생각은 대개 가지치기를 많이 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한창 생각에 잠겨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문득 시작을 떠올리면, 처음의 고민과 너무나 동떨어진 곳으로 흘러왔음에 깜짝 놀란다. 부질없는 시간과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쓸데없이 내 감정만 상한다. 


후회에 대해 곱씹다가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이국환, 산지니, 2019)라는 책에서 인상에 남는 문장을 발견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후회가 생긴다면 그건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잠시 읽기를 멈추었다. 나의 '열심히'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내가 아니라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 삶을 열심히 산 거라면, 후회로 가슴을 치는 형벌을 받는 것이 그리 억울할 일은 아니다. 형벌이 교화를 위한 처벌이라면, 후회라는 형벌이 나를 돌보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인생은 짧다. 후회는 의무와 도리를 다했고 열심히 살았다는 핑계로 내 삶을 유기한 죄, 그리하여 정작 나를 돌보지 않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저자는 니체의 이야기를 빌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법을 이야기한다. 낙타는 등짐을 지고 말없이 사막을 건넌다. 낙타가 짊어진 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다. 책임과 의무 같은 세상이 지워준 무게를 감당하며 사는 우리의 삶은 낙타에 비유된다. 그 인내와 희생을 폄하할 수는 없지만, 의무와 희생으로 가득 찬 삶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니체는 짐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 관습이나 타인이 만든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의지'대로 사는 삶을 빗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의무와 책임)은 있으나 이르고자 하는 대상(나의 선택, 내가 원하는 삶)이 없다면 자유는 무질서의 다른 이름이 되기 쉽다. 니체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 이제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의무를 직시하며 살아가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후회가 덜하다는 얘기다.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분명하지만, 본디 사무친 후회 없이 삶의 성찰에 이르기는 어렵다. 성찰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살피는 행위이다. 후회가 상처를 남긴다면 성찰은 자기 마음을 살핌으로써 오히려 상처를 치유한다.



나이가 들수록 후회되는 일이 많아진다. 과거로 밀려난 일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간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 미련도 생기고 아쉬움도 커진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우리는 자꾸만 지금과 지금이 될 미래를 살아가야 하니 후회하는 마음 그대로 머물 수는 없다. 저자의 말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면 온전한 나로 사는 삶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후회가 깊어지고 시름이 늘어난다면 잠시 멈추고 '생각 챙김'을 해보자. 후회와 성찰 그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지금을 살아간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정호승 시인의 말을 빌어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불안,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


비슷한 패턴으로 불안한 마음도 수시로 찾아든다. 불안은 후회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한 감정이다. 불안할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수많은 경우를 가정해서 시뮬레이션한다. 일상을 벗어난 일들에 대해 심하다 싶을 만큼 준비하고 확인하는 것도 모두 불안함 때문이다. 

여행 가기 전에 여행지 정보부터 숙소나 식당을 검색하는 것은 기본이다. 공식홈이나 블로그 한두 개만 봐도 충분할 일인데 가기도 전에 여행지 정보를 읊을 정도로 검색된 사이트를 모두 열어본다. 여기에 만약을 가정해 B플랜까지 세우다 보면 떠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남들이 잘 찍은 사진을 보고 갔다가 막상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고, 생각지 못한 다른 변수로 저장해 둔 식당에 못 가는 때가 부지기수인데도 그런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가던 길이 아니라면 교통체증이나 주차 문제가 신경이 쓰여 운전하기가 겁난다.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충분할 일이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늦을까, 버스를 오래 기다릴까 걱정되어 버스와 지하철 환승 시간까지 계산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강박인가 싶을 만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은 모두 불안한 마음 탓이다. 버스앱으로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놓고 정작 예정된 시각에 딴생각에 빠져 다른 버스를 타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 내가 못 미더워 갈수록 불안은 커진다. 혹시 실수할까 봐, 약속에 늦어 신의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다.

저녁을 준비하다 냉장고 앞에 가서는 뭘 꺼내려했는지 생각이 안 나는 중년의 건망증은 차라리 낫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자꾸만 실수하고 허점이 드러나는 행동에 자신감이 점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래서 뭔 일을 하겠나 싶어 불안은 점점 커진다.


아무리 고민해도 어찌할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모든 가능성을 다 시뮬레이션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게 가능하다 한들 일어날 일이 내 예상과 딱 맞게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다음 달과 내년을 걱정하고, 일찍 죽을지도 모르는데 칠팔십 살의 노년을 걱정한다. 그 미래를 만드는 건 지금, 매일의 시간과 내 작은 행동들인데 나는 지금을 살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셈이다. 



후회와 불안 사이, 흔들리는 지금


아이가 어렸을 때 더 즐겁게 키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더 살갑게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아이가 크면 혼자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늙어가는 나는 그간 잃어버린 나 자신을 어떻게 찾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불안해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 후회와 불안 사이에서 쫓기는 기분이다. 아쉬움 가득한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른 채 시간만 흘려보내며 초조해한다.


이만큼 살았으면 충분하다 싶으면서도 주변을 돌아보면 자꾸 비교하게 된다. 남들은 일도 하면서 내가 이룬 것들을 다 이루고 사는데 나만 혼자 뒤처지는 것 같다. 큰돈도 전문직도 없는 중년 아줌마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런 고민들이 나의 정체성을 흔든다. 내가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었나,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내가 잘하는 건 뭘까, 내가 이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있을까 생각이 걱정을 부추긴다.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걱정과 불안은 어느 나이를 살든 늘 비슷한 무게로 삶을 채운다. 그럴 때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매트 헤이그 지음, 최재은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2)은 작은 위로가 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저자이기도 한 매트 헤이그는 '미친 세상'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니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고, 그것이 우리의 내면이 단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내가 흔들리는 것일 뿐 내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말기, 불안할 때 우리를 뒤흔드는 세상을 직시하기, 그 거센 파도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기,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의식'하기. 이것이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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