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다고 해서 당연한 건 아니다
앞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방법은 없지만 상상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 예측 덕분에 미리 준비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지금을 돌아볼 때 후회를 덜 하는 것도 앞날을 그려보는 우리의 의식 덕분에 가능하다.
예측의 대부분은 불확실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처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고전에서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삶의 원칙들이 그러하다.
삶의 고비를 겪으면서 다들 자기만의 삶의 법칙 같은 걸 한두 가지쯤 마음에 새기게 된다. 나도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머리로만 알았던 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걸 가만히 곱씹어 보니 익숙해서 잊고 사는 것들이 있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는 하루종일 먹고 말하고 걷고 생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잘하지는 않았던 일이다. 유아기에 숱한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익숙해졌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로 먹고 말하고 걷고 생각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돌아보면 이 당연한 일이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걸 암이 뇌로 전이되었던 엄마의 마지막을 돌보면서 몸으로 힘들게 깨달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자꾸 넘어지더니 서서히 팔다리에 힘을 잃어갔다. 혼자 걷지 못하고 숟가락질이 힘들게 되면서 삶의 질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말이 제자리를 잃고 횡설수설하면서 대화도 어려워졌고, 머릿속 생각은 그대로 갇혀 침묵에 빠졌다. 그건 일상의 당연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어느 집에서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갑자기 혼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또 어느 집에서는 치매에 걸려 다른 시대를 사는 부모와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도 종종 생긴다. 평생 당연하게 해온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이 단순히 나이 들고 병들어가는 과정이라 여기고 끝낼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행동 중에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은 없다. 뇌의 치밀한 작용, 의지와 신체적 건강이 모두 갖추어져야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고, 원하는 방향으로 내 몸을 움직이고, 내 의도를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당연하다 여긴 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능한 나의 신체적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건강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운동은 작심삼일로 묻히기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니 나도 사회적 역할을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인근 학교에서 느린 학습자나 장애 아동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아이를 둘이나 키웠으니 돌봄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자폐나 지능 장애 같은 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학습은 고사하고 제 또래와 함께 놀기도 어렵고 의사표현도 쉽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는 자기 생각은 고집과 생떼로 드러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먹고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태어나기만 하면 당연하다 생각했던 성장의 지표들이 힘들 이들이 많다. 때가 되면 당연하다 여겼던, 말하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게 꼭 당연한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된다. 먹고 말하고 걷는 것처럼 일상의 당연한 일들은 돈이나 명예, 혹은 남들의 인정 같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건강하게 존재한다는 것 하나로 할 수 있는 일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일상이 고마운 일이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잘하게 아픈 데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다. 남의 도움 없이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감정을 조절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는 태도는 건강에서 비롯된다.
평소에는 이런 평범한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 그럴 때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위한 찬사>(마리나 반 주일렌 지음, 박효은 옮김, 피카, 2024)를 읽는다. 어릴 때부터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는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세뇌당한 듯, 어른이 되었는데도 무언가가 되지 못한 나는 늘 뭔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양 여겨졌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비겁하지 않으면서 평범할 수는 없는 걸까?
(중략)
대수롭지 않은 역할, 자기 비하에 대해
내가 실상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왜 그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까? (p.153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서는 이름만 대도 무게감이 실리는 철학자나 작가들의 목소리를 빌려 대단한 누군가가 되지 못했어도 괜찮다고, 평범하고 사소해도 우리 인생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어떤 것도 지금과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말이다.
그것은 또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단순히 견디기만 하지 않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중략)
그것을 사랑하는 일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위의 책에서 재인용.
이루지 못한 것들을 갈망하며 평범하다 못해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모든 행동을 떠올려본다. 숨 쉬는 것부터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 가고, 밥을 떠먹거나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 일상의 모든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옆에 있어도 외롭다 여기는 가족이 못마땅할 때가 많지만, 투닥거리는 가족조차 당연하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낮고 보잘것없는 곳에서도 빛을 찾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 몫이다.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찬란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찾으라는 현자들의 말이 멀다 느낀다면 주변을 돌아보자. 당연하다 여겼던 것을 잃고 흔들리는 평범한 이들이 너무나 많다. 잃기 전에 그 가치를 알아차린다면 내 일상은 매일이 특별한 것이 된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사소하지만 평범한 데서 시작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