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이 없다는 앞선 글에 이어 또 하나 세상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중’이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미루는 일이 많다. ‘이것만 끝내면, 다음번에, 내년에는’처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들을 항상 나중으로 미룬다. 할 일이 너무 많은 중년이니 어쩔 수가 없다. 문제는 ‘나중’이라 불리던 그때가 되면 잊어버리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와 상황이 생겨 다시 ‘나중에’ 하기로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친정엄마가 아팠을 때 시어머니 생신을 챙기기 위해 시누이네 가족까지 모두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다. 밤에 잠은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되어 짬을 내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체념적인 목소리로 ‘나는 이제 여행은 다 갔다’라며 속이 상하는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핀잔을 주면서 속으로 엄마와도 같이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이별이 멀지 않은 때라는 걸 알았기에 이왕이면 친정 식구들 모두 함께 하는 여행이길 바랐다. 엄마가 자식들과 손주들을 거느리고 떠난 여행에서 당신의 한평생에 이룬 것이 많음을 느끼길 바랐다.
욕심이었다. 가족 모두가 모이기에는 시간 조율이 필요했고,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가능한 시간은 그로부터 3주 뒤였다. 그깟 3주. 일상에서는 바빠서 금세 지나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모두에게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엄마의 건강은 더 나빠졌고, 야속하게도 여행 당일 엄마는 갑자기 걷기가 힘들어지면서 푸른 바다와 하늘을 눈앞에 두고도 숙소 안에 내내 앉거나 누워있어야 했다. 결국 이튿날 아침, 갑자기 거동이 힘들어진 엄마를 응급실로 모시고 가는 것으로 그 여행은 끝이 났다.
어렵게 시간을 맞춘 가족들 어느 누구도 즐겁지 않았다. 왜 3주 뒤로 여행을 미루었을까? 같이 못 가는 식구가 있으면 뭐 어떻다고 욕심을 부렸을까? 여행을 가자고 마음먹었던 그다음 주에, 혼자라도 어디든 모시고 갔으면 즐거운 여행 기억이 하나라도 더 남았을 텐데 왜 나중으로 미루었을까?
이왕이면 다 같이, 이왕이면 의미 있게, 이왕이면 좋은 데로….
‘이왕이면 더’라는 욕심은 끝이 없다. 그렇게 더 좋기를 바랐던 일들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엄마를 떠나보내고 엄마와의 여행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제야 ‘나중에 밥 한번 먹자, 나중에 차 한 잔 해요, 나중에 연락해야지, 나중에 어디 좋은 데로 여행 가자’란 말들이 기대에 찬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미루기’라는 걸 알았다.
기다려주지 않는 모든 것들
나중은 없다. 기대하던 ‘나중’의 시간이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의욕 가득한 내 마음도, 상황이나 처지도, 함께 할 이도 모두 지금 생각하는 그대로 기다려주지 않는다. 더 잘하기를 바라고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을 자꾸 미룬다.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문자라도 한 통 보내야 한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나중에 비행기 타고 멋진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기 전에 이번 주말에 가까운 공원에라도 다녀올 수 있어야 한다. 흔히 나중에 꼭 해보리라며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하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 정도’라는 말은 ‘나중에’만큼이나 두루뭉술한 계획이다. 지금 생각엔 조금만 있으면 '그때'가 될 것 같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아직도 끝나지 못한 일이 있고 여전히 돈 들어갈 일이 많다. 꼭 해보고 싶지만 급하지 않은 일들은 그렇게 또 '나중에 혹은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면서 미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나이를 훌쩍 먹고는,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체념 같은 말로 이루지 못한 꿈들에 대한 핑계를 만들어대거나 왜 진작에 하지 못하고 미루었나 자책하기도 한다.
너무 먼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을 살아야 한다. 언젠가 하고 싶다면, 지금 그것에 가까워지는 작은 행동을 하나라도 하는 게 좋다. 아프지 않고 늙고 싶다면, 지금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걷는 게 나중에 건강검진을 받거나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보다 낫다. 그 작은 행동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원하는 모습 혹은 바라던 것에 더 가까이 가 있을 것이다.
나중을 기약하는 이유는 지금 생각하는 걸 시도하기엔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무리수를 두어 시도해 봐야 힘들기만 할 뿐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에 자꾸 머뭇거린다. 이루지 못하면 어떤가,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나이만 먹고 시도할 용기가 없는 것보다는 실패해도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후회는 덜할 것이다. 살아보니 뭐든 저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수습은 된다.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된다
엄마의 병간호, 두 아이의 양육, 혼자 도맡은 집안일, 파트타임으로 일까지 하면서 가장 바쁘던 그때, 나는 무모하게도 오래 미루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서른 중반을 넘어 두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이 성장해 나가는 일이 너무 신기할 때가 많았다. 꼬물꼬물 울고 먹고 싸기만 하는 아기가 점점 자라서 혼자 걷고 뛰고 말을 배워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아이의 성장과 정반대로 친정엄마는 점점 키가 줄고, 진료과를 달리하며 수시로 병원을 다니고, 같이 해주기를 바라는 일이 점점 늘어갔다. 밥을 짓다 냉장고 앞에서 문을 열고는 뭘 꺼내려고 했는지 깜빡거리는 일이 예사고, 자식들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일도 잦아졌다. 커가는 아이와 혼자된 지 오래된 늙은 엄마 사이에 끼어 나도 나이가 들어갔다. 사는 게 뭘까 의미를 찾는 내 마음까지 들여다보다가 한평생 변해가는 사람 마음이 궁금해졌다.
마침 심리학이 유행처럼 번져 내면아이를 돌보라고 부추기고,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이나 마음 챙김, 그리고 엄마의 노화를 이해하고 싶은 지적 허영심이 맞물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타올랐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생긴다. 그때 내 발목을 붙든 것도 ‘나중에’라는 말이었다. 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사는 삼십 대 후반에 직업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닌 전업주부에게 공부는 사치라 생각했다. 애들 좀 크고 나면 나중에 하고 싶은 공부 해야지 하고 언젠가를 기약하면서, 틈나는 대로 책을 읽는 작은 행동으로 나를 위한다 위로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암이라는 걸 알았다. 진단을 받은 오늘과 그냥 좀 아프던 어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하루 새에 멀쩡한 사람이 곧 죽을 사람이 된 것이다. 죽음이 막연하게 먼 미래가 아니라는 게 무섭도록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항암치료가 시작되면서 몸과 마음은 더 바빠졌다. 그런데 나는 무모하게도 지난 수년간 미뤄왔던 심리학 공부를 그때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어 학점은행제에 등록해서 온라인으로 학위를 따기로 한 것이다.
제일 힘든 때에 굳이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학위 과정을 이수해야 하나 싶은 내적 검열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러나 지적 허영심이라는 걸 익히 알면서도 기어이 일을 벌인 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싶은 건 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데 비용과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나를 말렸던 내부 검열자는 늘 쓸모와 효용을 따지는 세상의 기준에 길들여진 나였다.
병에 걸려 두려워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겁이 났다. 요즘은 젊은 나이에도 암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를 많이 당한다는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예상하고 있다가 별안간 죽음을 맞이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아쉬운 게 많을까 싶었다. 죽을 때를 미리 알지는 못하니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시간을 산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부를 하는데 드는 돈 몇 푼, 부족한 잠 몇 시간 같은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거,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투기나 도박 같은 나쁜 일에 쓸 것도 아닌데 그거 아껴서 뭐 하나, 죽으면 썩을 몸, 한평생도 아니고 잠깐 동안 잠 좀 덜 자면 어떤가 하는 이상한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힘이 들긴 했어도 어찌어찌해냈다. 한동안 피곤에 찌들어 있기는 했지만 원하던 일을 하나 끝낸 것이다. 하고 보니 별거 아닌 걸 왜 몇 년씩이나 미루고 나중을 기약했는지 좀 허무하기까지 했다.
처음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시작했다면 그 몇 년 사이 나는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미약하나마 배움으로 넓어진 시각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젊었고, 엄마가 건강해서 내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었고, 전업주부였던 그때, 왜 ‘이 나이에,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하는 이유들로 나를 억눌렀을까? 마흔이 넘어 체력과 기억력은 더 나빠졌고, 엄마의 암투병으로 돌봄은 배가 되었고,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있었던 그때 하필 행동으로 옮겼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시간의 유한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의 죽음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나도 죽을 때가 올 것이라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고작 몇 년 전 일도 내내 미련이 남고 그때 할 걸 하고 후회하는데 죽을 때가 되면 늦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지금이 또 얼마나 안타까운 시간이 될지 너무나 선명해졌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숱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결과와 쓸모를 계산하느라 지레 지쳐버린다. 그런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행동으로 옮기면 어떻게든 하게 된다.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해도, 혹은 실패를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 꼭 해야 하는 일도,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은 일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
언젠가 내가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십 대가 되어 마흔에 할 걸 하고 후회할 일을 하나 줄였다. 죽음을 떠올리면 지금 내 삶에 충실해진다. 주어진 시간이 끝이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나 하는 생각만으로도 선택이 달라진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생긴다면 노트에 적기 전에 그것을 위한 작은 행동부터 하나 시작하자. 나중은 없다.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건 너무 흔한 말이지만, 정말 나이가 지긋한 인생 선배가 진심으로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더 깊이 마음에 남는다. 책 추천이 빠지면 서운할 터, 글을 맺으며 미래 내 노년의 롤모델인 메리 파이퍼가 쓴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서유라 옮김, 티라미수 더북, 2019)를 읽어보길 권한다.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Laura Carstensen)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남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간은 삶이 짧다고 생각할수록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일상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사색과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카스텐슨의 연구에 따르면, 나이 들수록 분노와 불안이 줄어든다. 나는 이러한 결과가 나이 든 이들이 덜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불행에도 더 나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즐거운 일에 더 집중한다. 노인에게는 '언젠가'라는 말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다.
(중략)
의사들은 환자에게 말기 암을 선고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당신은 지금부터 인생에서 가장 압축적인 시간을 보내게 될 겁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임박하지 않으면 그 깊고 심오한 감정의 단계를 체험하지 못한다. 삶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과 함께 찾아오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메리 파이퍼 지음, 서유라 옮김, 티라미수, pp. 92-9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