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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Sep 26. 2024

12. 지나간 것, 앞으로 올 것

그 사이에서 나로 살기

지난날을 안고 살아간다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 속에서나 가능하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마음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그때’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이야기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일,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닌 일에 둔감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냥 귀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지금껏 살면서 겪은 일 덕분에 알게 된 것이다. 과거의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해도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할지도 모른다. 이해의 폭은 딱 그 나이에 살아온 경험만큼만 넓어진다. 그러니 부질없는 후회나 아쉬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매트 헤이그의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노진선 옮김, 인플루엔셜, 2021)는 자살을 시도한 주인공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지금과 전혀 다른 인생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했던 꿈과 어긋났던 가족들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여러 버전의 자기 인생을 경험한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원하는 직업을 가져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공을 해도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진 않다. 죽음 앞에서 의식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생들은 자살을 시도할 만큼 힘든 날들 속에서 주인공이 날마다 곱씹던 과거였을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이 완벽하리란 보장도 없는데 우리는 종종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한다.

 

나도 가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마 사는 게 고달픈 때였을 것이다. 누구든 그런 부침은 있다. 살아가는 일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무수한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선택하는 것은 하나다.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지 않아 아쉬워도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때는 그리 많지 않다.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다. 지금 가진 절망의 무게가 크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이 무겁다 해도 '죽음'만큼 무겁진 않을 것이다. 현실에는 여러 번의 삶을 사는 평행이론이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이 유일하게 머물고 싶어 했던 완벽한 삶도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었기에 그 삶에 정착하려는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결국 제자리,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힘들어도 지금 여기에서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는 용기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슬픔과 절망, 용기와 노력, 그리고 희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렇게 생의 한 시기를 살아낸다. 과거는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을 살아온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속이 편하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를 수용하는 지금과, 그 노력으로 달라질 미래뿐이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라도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그것이 오롯이 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인생 회고 질문은 지금 던져야 한다     


엄마와 호스피스에 머무는 내내 나이 지긋한 병원 사회복지사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왔다. 일반 병동과 달리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감염의 우려가 있거나 임종기에 들어가서 가족 면회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다인실을 쓴다. 다인실은 간병인이 상주하니 보호자가 없어도 환자를 돌보기 쉽고 병실료도 따로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1인실을 썼다. 딱히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입원할 때 코로나 검사에서 내가 양성으로 진단되지 않는 정도의 약한 바이러스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여 전에 감염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양성이 아니니 퇴원하라고도 할 수 없고, 입원시키자니 혹시 모를 감염이 걱정되는지 의료진은 고민했다. 이대로 집에 갈 수도 없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싫어 엄마와 나는 1인실에 계속 머무르던 참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물을 받으러 갈 때가 아니면 방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으니 복도에서 나를 볼 때마다 사회복지사는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마음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묻는 말에 간단히 대답만 하고는 얼른 병실로 들어가곤 했다.


입원 첫날 면담에서 사회복지사가 엄마의 생애가 어땠는지 묻던 일을 가끔 떠올린다. 엄마의 취미나 가족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엄마가 살면서 무엇을 가장 후회하고 안타까워했는지, 엄마의 성장 과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나 아빠와 사별한 이후에 어떻게 지내왔는지, 평소 엄마가 원하는 게 뭐였는지 세세하게 물었다. 엄마가 의식이 있었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었을 법한 질문들에 대해 나는 내가 아는 엄마의 인생을 들려주었다. 대답을 하면서 진짜 엄마의 일생과 내가 아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클까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의 인생을 대신 회고하면서 엄마의 고달팠던 인생이 꼭 내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살던 때의 막막함, 평생 의지하고 살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혼자 남겨진 먹먹한 심정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나 역시 결혼 이후 낯선 곳에 이사 가서 모든 생활을 리셋해야 했고, 지금도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의논의 대상이 되는 남편이 없을 때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에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여자로서 비슷한 삶을 겪었지만, 사회복지사의 질문을 받고서야 엄마의 삶이 하나의 서사로 엮였다.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볼 때처럼 그 서사에 감정이입이 되자 나는 한없이 서러워졌다. 그리고 비슷한 장면이 하나 더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내가 죽음을 앞두고 이 질문들을 받고 있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저마다의 고민과 복잡한 관계 속에서 흔들리며 산다. 즐겁고 기쁜 일도 종종 생기고 아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겨내면서 내면의 힘도 기른다.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면 그렇게 살아온 날들의 물결이 생긴다. 상처받은 과거나 실패를 경험하는 현재, 혹은 화려했던 과거나 평온한 현재 모두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온 경험이다. 

평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 주변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힘들 때 어떤 태도로 극복해 나가는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대답을 하면서 살아온 날들이 엮이고 내 삶은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더하고 싶거나 빼고 싶은 것도 보인다.


애초에 '앎'을 '삶'으로 끌어와 잘 살고 싶은 생각에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잘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가도 가끔 인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병원 사회복지사의 질문에 답하듯 죽음의 면전에서 인생을 회고할 필요는 없다. 죽음 앞에서는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을 다시 고쳐 살 기회가 없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을 때 죽음을 앞에 둔 것처럼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패자부활전처럼 새로운 기회를 잡거나 잘못했던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끝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겸허해진다. 남은 인생의 길이를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인지를 깨닫게 된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인생을 다시 사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간 일들은 점점 흐릿해진다. 특별했던 경험도, 억장이 무너졌던 순간도 지나고 나면 감정은 시간에 희석되고 그땐 그랬지 하며 기억으로만 남는다. 아빠의 죽음이 그렇듯 엄마의 죽음도 언젠가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돌아보는 게 많이 아프지만 때로는 고통을 감내하고 떠올리고 회복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사람이 내면 아이를 돌보며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듯 과거는 그저 묻어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그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사람들 틈에 홀로 있던 시간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아직 마음이 쓰리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에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기어이 다시 그때를 떠올리는 용기를 내어 보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에게 건네는 질문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후회와 아쉬움 가득하지만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노년의 어느 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돌아보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 하는 일에 마음을 쏟기     


 <도쿄 윤카페>(윤영희 지음, 책구름, 2023)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하거나 받은 적이 언젠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되었다. 내가 선물한 책이 상대의 취향에 맞지 않아 내가 느낀 울림을 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이후부터 책 선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했을까? 나이가 들면서 책을 주고받는 일이 사라졌다. <도쿄 윤카페>를 선물해 준 이는 나보다 열 살도 더 어린 젊은이다. 서로의 근황만 지인을 통해 전해 들을 뿐, 자주 본 사이도 아니고 접점이 될 만한 게 거의 없는 그녀가 어느 날 문득 내 삶에 들어왔다. 책만큼이나 자기 취향에 맞게 사람의 연이 이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만남이다. 부모를 잃고 자기 삶을 찾아가는 중년의 에세이를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수줍게 책을 건네는 그녀의 마음이 참 예뻤다.


취향이 비슷한 인연이어서일까, 나도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 다른 삶의 범주에서 비슷한 경험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넸다. 엄마를 보내고 고아가 된 기분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어쩜 이리 내 마음과 닮았을까 싶었고, 늦었다고 생각될 때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삶을 꾸려가는 모습에서 앞으로 내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을 확인했다. 인생 선배의 친근한 이야기에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책이 주는 희망이다.


윤카페의 주인장 이야기가 그토록 와닿은 것은 그녀가 삶의 매 순간을 성실히 살아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지는 진정성 덕분이다. 그 책에서 발견한 문장 ‘마음이 깊으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나에게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하자는 결심을 가지게 했다. 때로는 자기 일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초라함을 느끼고,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일로 내 인생이 다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육아와 가사는 잘해도 티가 안 나고, 조금만 소홀하면 금방 엉망이 된다. 그런 삶이 십 년 넘게 지속되면 아무리 자존감이 강해도 자꾸 뒷걸음질 치게 된다. 그런 마음을 인정하고 용기를 낸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을 달리하라고 조언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티 안 나고,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알고 있는데. 지금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면 어디든 가 닿지 않겠는가. 그렇게 오늘도 마음 깊이를 한 뼘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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