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

류이치 사카모토를 들으며

by 제이

벚꽃처럼 핀 너는

비처럼 떨어졌고

낙엽처럼 나를 스쳐가

눈처럼 발등을 얼렸다

꽃들이 장마에 쓸려갔다고

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푸르던 잎은 시간에 익어가고

꽃과 잎새가 머무른 자리에는

눈이 한 움큼 올려져 있을 거다

결국 다 땅으로 스며든다지만

너의 흔적만은 나이테가 되어

나의 안에 박혀있을 것만 같다

왜 그렇게 아름다워야 했을까

왜 그렇게 날 적셔야만 했을까

어떻게 그리 가벼울 수 있었고

어떻게 그리 차가울 수 있었나

너는 바람처럼 너의 자리를 찾아가겠지만

나는 이곳에 뿌리가 박힌 채로 살지 않을까

언젠가 눈이 다 녹으면

꽃을 기다릴 것만 같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샤워를 하며 음악을 듣곤 하는데, 종종 듣던 플레이리스트 유튜버의 채널에 있던 곡을 선택하게 되었다. 곡의 주제는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의 짧은 농담 뒤에 시작된 첫 곡은 Merry Christmas Mr. Lawrence. 곡의 처음 두 마디를 듣고서 갑자기 눈처럼 떨어지던 벚꽃이 생각났다. 그리고 곧바로 위 시의 첫 문단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서정적인 글을 피하는 편이다. 사람이 너무 감정적으로 보이고, 너무 물러 보여서 그런 것 같다. 20살 초부터 글을 쓸 때 감정을 덜어내고 담백하게 쓰는 법을 연습해 왔다. 지금은 담백한 글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데 글은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를 써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쓰는 시였던지라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샤워를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좋은 재료들이 채워졌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말하긴 조금 늦었지만 시의 전반적인 구조와 주제는 샤워를 하면서 거의 다 정리할 수 있었다.

시의 모든 글자 수를 인지하며 글을 쓰진 않지만, 다 쓰고 나면 대개 문단 안의 글자 수가 거의 비슷하게 맞춰진다. 국어 시간에 배우는 운율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다 쓰고 조금 다듬긴 했지만, 자연스레 운율이 맞는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 거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저번 학기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교수님께 피드백 아닌 피드백을 들었다. 내 글은 모두가 공감하고, 모두가 대입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한다. 내 개인적인,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제였던 글이었음에도 나는 모두가 대입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 누구나 내 글에 대입할 수 있으면 한다. 공감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도 적용될 수 있는 거니까. T로서 이런 식으로 공감을 끌어낸다는 게 특이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 중에서 좋아하는 곡으로는 Merry Christmas Mr. Lawrence, Solitude, Flower, A Flower is not a Flower를 꼽을 수 있겠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내가 처음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을 접하게 된 계기였다. Solitude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니 타키타니”의 수록곡 중 하나인데,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곡의 제목이 음악 전반을 다 표현하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Flower와 A Flower is not a Flower는 같이 언급하게 되는 음악인데, Flower는 A Flower is not a Flower에 가사를 붙인 곡이다. A Flower is not a Flower는 백거이의 화비화라는 곡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좋은 시고,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오랜만에 서정적인 글을 써봤다. 당분간은 이런 마음을 다시 숨기며 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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