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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Jul 30. 2023

드라마 <청춘시대> 신비한 여성 언어 사용법

드라마 리뷰

요즈음 <청춘시대> 시즌 1, 2를 정주행 했다. <여대생 밀착 동거담> 이란 선정적인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드라마는 부제와 어울리는 리얼한 인물들로 굉장히 민감하고 어려운 소재들을 아주 잘 풀어나간 수작(秀作) 드라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사들이 아주 좋고 내레이션도 탁월하다. 물론 구성도 좋고 캐릭터도 모두 좋았다. 그래서 내게 이 드라마는 마치 꼭꼭 숨겨놓은 선물 같았다.


그중에서도 드라마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나에게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등장하는 여성들이 놀랍도록 섬세하게 말을 활용하고, 그 말에 죄다 촘촘하게 감정을 심어 놓더라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도 이런 전제하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렇다는 이야기를 분명히 들은 적은 있지만 지금껏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남자형제틈에서 자랐고, 이렇게 본격적으로 여성들만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드라마는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 나서야 이런 사실이 피부에 와닿게 된 것이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나는 여성이 말을 그렇게 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남자들도 때때로 섬세하게 말하고 그 말에 감정을 싣기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듣는 상대 남자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걸 딱히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소용이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발전을 못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성들은 항상 '특별한 경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드라마만 보고는 알 수 없고, 게다가 여성들 사이에 편차가 있겠지만 어쨌든) 여성들은 상대의 말을 통해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놀라우리만큼 잘 알아채는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 <청춘시대>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남자인 내가 보기에 정말 "비한 여성 언어 사용법"처럼 느껴진다.


나는 <청춘시대>를 보고 20대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스무 살>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그 차이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20대의 남자들은 모여서 허풍을 떨고, 20대 여자들은 모여서 비밀을 나눈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들에게 말은 날카로운 칼이나 시뻘겋게 달궈진 인두와 다를 바 없는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니 민감한 어떤 여성들에게 말은 때로 큰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 같다. 같은 이유로 남자인 나는 살아오면서 어쩌면 수많은 여성들에게 나도 모르게 말로 상처를 줬을지 모르겠다. 여자친구에게 무심히 뱉은 어떤 말이 상처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 그녀를 할퀴려고 일부러 한 말은 또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 (아참참!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같이 사는 내 아내는? 그간 나랑 살면서 아내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지게 됐을까?)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진다.


며칠 전 여자 후배를 만나 오랜만에 점심을 먹고 근처 성당을 구경할 때였다. 20대 후반인 그녀는 이제 막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었다. 나도 20대 때에 그랬던 적이 있었다. 보상 없이 사랑하길 바라고, 내 이야기가 나를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말의 의미는 이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체 무슨 두꺼비가 강남에서 박씨 물어오는 소리냐며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처음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더 이상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마치 "나 아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많이 아파?"라고 하거나 "왜? 어디가 어떻게 아파?"라고 묻지 않고 "아침으로 그딴 걸 먹으니까 배가 아프지! 으이그!"라고 대답하는 식이랄까? 아니, 이렇게 설명을 해보자. 나의 삶에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하는 사랑이란 더 이상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내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은 애초에 보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전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내 자신의 이야기를 벗어난 이야기란 오랜 시간 상업영화 작가로 살아온 나에게는 그저 헤피엔딩이 아닌 어떤 이야기라는 말로 들릴 뿐이다. 자기 이야기란 자전적이란 뜻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 이건  모든 이야기를 마치 중력처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는 내가 쓰는 이야기 방식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나는 그 중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20대의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드라마 <청춘시대>를 보며 그즈음 나를 떠 올려 본다. 그리고 그때 여자 사람들의 입장도 새삼스레 되돌이켜 본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만일 지금의 내가 그때로 간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여성이 말을 어떻게 쓰는지 아는 것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건 다르다. 마치 여자 후배의 말들을 내가 알아듣긴 해도 더 이상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를 쓴 작가를 찾아보니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시절에 영화를 시작했었다. 그녀가 이토록 멋지게 <청춘시대>를 그리는 동안 나는 철 지나 버린 내 청춘의 시대를 떠올리고 다. 드라마를 보고 갑자기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에 서 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마치 사람들이 청춘이 지나고도 여전히 남자들은 허풍을 떨고, 여자들은 비밀을 나누며 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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