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len rabbit Sep 06. 2023

김환기전

김환기 초기 작품의 질감은 특이하다. 층층이 두껍게 칠해진 물감이 묘한 느낌을 전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 속 정물들이 캠퍼스에 아련하게 녹아들어 간 듯, 투박하지만 정감이 넘쳐서 사물의 정서를 켜켜이 쌓아 올린 느낌이다. 때문에 추상이자 구상인 그의 그림은 이질감이 전혀 없다.

나중에 그는 캠퍼스에 얇고 투명하게 칠한 선과 점으로만 이루어진 추상화를 그렸다. 작품 속에 연속된 점들은 세상 만물의 질서를 담은 듯하다. 완벽한 추상임에도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낯섦 없이 아름다웠다.


그의 첫 미술전 입상은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였다고 한다. 그는 무엇이 자신다울까를 고민하다가 한복을 입은 누이를 그렸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 여인의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입상이라니! 어떤 장벽도 미술을 위해서라면 간단히 넘어버리는 그는 진짜 예술가였나 다.

그가 완벽한 추상으로 가기 전 그림들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특히 그가 좋아했던 것은 달과 조선 백자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 중에는 조선 백자가 모티브인 작품이 여럿 있다. 그는 조선백자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캠퍼스에 옮기려고 했던 것 같다. 이쪽에서 봤을 때의 조선 백자, 저쪽에서 봤을 때의  백자. 게슴츠레 보는 백자, 달빛 아래 보는 백자, 꽃과 함께 있는 백자... 계속되는 백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다가 문득 전시실에서 진짜 조선백자와 마주쳤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 네가 걔구나!"

김환기 작가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백자라고 한다. 그토록 사랑했고 그토록 많이 그렸던 그 백자! 동그랗고 하얗고 그래서 너무 귀엽고 갸륵해서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파리에 있을 때 김환기는 삼복의 찜통더위 속에 허리도 못 펴는 다락방에서 하루종일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는 가 닿고 싶은 곳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파리에서 불어를 배울 생각은 못하고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나 어릴 적에 유행하던 그 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생각으로 한국적 미를 찾으려 애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조선백자가 점이 되고, 그의 별도 점이 되고, 그의 바람과 구름과 인간군상들도 모두 점이 되었다. 격자에 나눠 담긴 이 수많은 점들은 나란히 달리고 때로는 서로 나뉘고 회전하면서 거대한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반짝이는 은하수의 거대한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다.

초기의 김환기가 본질적인 형태는 남긴 채 추상과 구상으로 대상을 재조합했다면, 이제는 마침내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그림은 압도적이고 경의롭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가장 한국적 미"가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품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분명 파리 시절의 김환기는 자신의 오랜 탐구가 훗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어떤 전시회보다 만족감이 높았다. 대체로 유명 화가의 전시회를 가면 정작 중요한 그림들은 몇 점 없이 변죽만 울리는 전시가 많다. 마치 찐빵은 엄청 큰데, 정작 속에 팥은 몇 알 없어서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팥이, 그것도 엄청 맛있는 이 잔뜩 들어 있는 찐빵이었다. 전시된 한 점 한 점이 모두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서 정말 좋았다. 보는 내내 이 엄청난 작가가 정말 한국 사람 맞구나. 이렇게 작품이 많다니! 과연 김환기 보유국이다! 신이 났다.


작가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있는 2층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된 작품들은 1층의 거대한 점묘화 그림에 이르러 끝이 난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작가가 이것을 차츰 점과 선만으로 표현하려는 과정 끝에 마침내 완성되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무엇을 고민했고, 그의 그림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김환기 작가 평생의 수고를 볼 수 있었던 너무나 행복한 전시회였다.


특히 이 전시회에서 내가 좋아했던 그림 <정원>다. 그림 속에는 부부가 잠을 자고, 아이도 자고, 선반에는 도자기가 하늘에는 달이, 름 곁에는 새가 날아가는 한 밤의 조용한 골목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작품이 너무 다정해서 가장 좋았다.

배부르게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니 호암 미술관의 경치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암 이 양반은 참 좋았겠다.'


작가의 이전글 슴슴하고 짭조름하고 씁쓸한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