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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Oct 15. 2023

집에 하나쯤 있는 "말하는 그릇"

혹은 걸어 다니는 오븐

출근하는 길에 엄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같은 단지 엄마들이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새삼스러웠다. 우리 딸이 어릴 때에나도 매일 아침 보던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나는 엄마들과 말도 한마디 못 섞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엄마들의 입김은 정말 대단했다. 

엄마들이 모인 곳에 가면 간혹

"누구 엄마 일해? 왜? 아빠가 뭐 하는데?"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가 직장을 다녀서 혹시라도 우리 딸이 공평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까 노심초사했었다.


요즘 내 잘못으로 인해 딸이 나와 말을 거의 섞지 않고 있다. 세상에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딸은 내가 있으면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는 딸이 돌아오면 늘 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온다.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원래 몫이 아니었어도, 가끔 마루에 앉아 다 같이 이야기를 하곤 했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여간 아니다. 그런데 눈치에 아내는 딸과 단 둘이 이야기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우리 집은 삼 형제였다. 그래서 언제나 집안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누구도 자잘한 일상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모여서 치킨을 먹어도 모여 앉은 목적은 오로지 치킨뿐, 대화는 거의 없었다. 간혹 집안의 적막을 찢는 것은 어머니의 잔소리나 아버지의 불호령 그리고 삼 형제의 퉁명한 대답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은 형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잘 살겠지 하고 뭘 묻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많은 집은 통화도 오래 하고, 이야기도 늘 많이 나눈다고 한다. 아내도 여자친구들과 통화를 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다. 그럼 나는 생각한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시간이나 하는 걸까?


"뭐 해?" 

"여자 친구랑 밥 먹었어."

"그래?"

"응." 

"?"

"우동."

하는 게 남자라면.


"뭐 해?"

"있잖아. 나 남친이랑 우동집 갔거든? 근데 여기 전엔 맛있었는데, 맛이 좀 바뀐 거 같아. 국물 맛이 좀 떨어졌어. 레시피가 바뀌었나? 직원들도 불친절하고. 여기 왜 이래?"

 "거기 어딘데? 나도 가지 말아야겠다."

하는 게 여자 아닐까?


이렇게 여자들은 일상의 다반사를 상호 평가하고, 그 가치 판단을 공유하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닐생각해 본다. 만일 그런 가치 공유가 없다면 서사가 만들어지지 않을 테고 그럼 그렇게 대화를 오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대화는 무서운 데가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나 딸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가치판단과 다른 말도 들어주고, 때로 화성 남자처럼 해결 모자를 쓰려는 것도 참을 줄 안다.


아무튼 요즈음 집안의 은따인 나는 아내와 딸이 방에서 나누는 대화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새삼스레 엄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이유인 듯하다.


아내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딸과의 대화 속에 나에 대한 험담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새 귀가 자꾸 간지럽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딸과 대화를 다시 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딸은 날 보려 하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  하지만 나도 믿는 구석은 있다. 아내가 아무리 딸과의 대화를 즐긴데도 틀림없이 헛헛한 부분이 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이성에게 말해야만 채워지는 헛헛함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동성과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열심히 밀가루를 치대는 것과 같다, 이성에게 말하는 것은  밀가루를 오븐에 굽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냥 칼국수를 해 먹어도 되지만 가끔은 빵도 먹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동성과의 대화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라, 그냥 냄비에 든 체로 먹어도 겠지만 그릇에 따로 덜어야 더 만족스러울 때도 . 그 그릇이 우리 집에서는 다. 그러니까 아내가 딸과 비밀스레 나눈 이야기도 언젠가 내 오븐에 들어오고 내 그릇에 담기는 기회가 오리라 믿어 본다.


그렇다. 사실 이 집에서 나는 오븐이고 그릇 같은 존재다. 솔직히 말해 없어도 되지만 있어도 좋은 존재. 그래서 우리 집에서 첫 번째는 하나뿐인 딸이고, 두 번째로 소중한 건 아내, 세 번째는 당연히 핸드폰. 그리고 나는 4번째. 없어도 그만이지만 하여튼 집에 있기는 한 그릇이나 오븐 같은 존재다. 오오- 감지덕지. 그렇다. 나도 이 집안에 내 자리가 있다! 4등이 어디냐!

어머. 우리집 오븐이 왜 여기 나와 있지?

딸 아빠를 용서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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