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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Feb 18. 2024

영화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해보자

이런 시각은 어떨까?

전에 없던 일이었다. 참 이례적으로 2000년의 전후로 수학자들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나왔었다. <굿윌 헌팅 1997> <파이 1998> <뷰티풀마인드 2001> 또 과학자나 해커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었다. <컨텍트 1997> <메트릭스 1999> <스워드피시 2001> 옆길이긴 하지만 수학문제를 강제로 풀어야 하는 <큐브 1997>도 있었다.

이렇게 잠깐 반짝한 이후 해커들은 주인공에서 사악한 악당이나 사이드킥으로 변했고, 수학자도 더 이상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대신 2011년 야구에 통계학을 응용하는 <머니볼>이 나왔다. (영화에서 스카우터들이 여자친구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선수가 실력이 없을 거라고 예상하는 장면은 정말 기가 막혔다.) 그리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마진콜 2013> <빅쇼트 2016> 등에서 수학을 하는 투자자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거나 미래를 만드는 인물은 아니었다. 더욱이 세상을 구원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수학자 앨런 튜닝을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 2014> 거쳐 작년에는 물리학자가 주인공인 롤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나왔다.

이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빅뱅이론>의 샐든이나 레너드 같은 괴짜 너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때로 그들은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지만, 그 때문에 고통을 받거나 정치적인 곤란을 겪기도 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쨌든 수학자들이 주인공으로 소환되던 시절은 어쩌면 드물게 인류에게 희망이 있었던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의 세계 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인류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을 경험했었다. 그런데 1991년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인류는 비로소 수십 년 케케묵은 갈등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막연하게나마 지구의 평화와 번영이 완성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다가올 새로운 세계는 수학이 해석하고, 과학 이끄는 세상이 될 거라고 예측한 것 같다.

하지만 곧바로 911이 터졌고, 다시 전쟁이 시작됐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냉전이 다시 돌아왔다. 세상은 과거의 인문학이 기대했던 미래와는 전혀 다르게 변했다. 개인은 점점 더 고립되고 소외되기만 했고, 사회적 계층과 계급은 더 강화되고 고착되기만 했다. 더 이상 세상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부질없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우리가 여기에 저항하고자 할 때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19세기 파리코뮌에 대한 회상이나 <레미제라블 2012>, 늙은 크린트이스트우드식의 보수주의 <그랜토리노 2008>이거나, 혹은 은퇴하고 싶어도 못하는 켄로치식 사회주의뿐이었다. <나, 다이넬 블레이크 2016> <미안해요, 리키 219>

어쩌면 그래서 놀란 감독은 인류는 핵폭탄이라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무기를 손에 쥐었지만, 그것을 감당해야 할 시인 태드록(인문학)은 자살했거나 혹은 자살당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희망찼던 20세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2023년에 이르러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선언을  한것이다. 그렇다. 마침내 우리는 한 손에는 핵폭탄을 쥐고 다른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었지만 정작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수학자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최근에 봤던 어떤 넷플릭스 영화 때문이다. 영화에는 과학자가 프로타고니스트로 나온다. 그래서 과학자가 희망이었던 시절도 있었지 하면서 앞의 영화들을 떠올린 것이다. 희망이 죽임을 당한 세계에서 우리의 서사는 기껏해야 개인의 복수를 집행하는 앙상하고 볼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는 <더티해리> 시리즈를 상업적이고 말초적이라며 비난했었는데 지금의 이야기들은 <더티해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칭찬하 시절 되었다. 게다가 이즈음 괴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괴물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듯한) 그럴싸한 설명조차 생략한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는지 얼렁 뚱땅이라도 설명할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쨌든 악당은 그래도 제대로 악당답게 그려졌으니까 됐잖아?" 하는 식이다.

이런 스토리에서 참기 힘든 것은 이야기가 완결성이 없다거나, 인과관계가 말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참기 힘든 점은 영화가 마치 TV 리얼극 <사랑과 전쟁>처럼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인과의 서술과 딱 거기에 필요한 만큼의 정보있다는 점이다.  SNS나 유튭의 숏츠들이 춤을 추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만들고, 여행을 하는 앙상한 정보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대다. 뉴스를 과도하게 보는 사람들처럼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짧고 필요한 정보만 담긴 앙상한 스토리에 중독돼어 있다. 돌아서면 휘발되어 버리는 이야기가 우리의 시간을 태우고 사라져 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저 과거에 받은 인문학 교육 탓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꼰대인가?) 그리고 정치인이 정치를 더럽다고 하거나, 식당 주인이 식당 밥이 형편없다고 하는 게 우습듯이, 영화하는 내가 꼴사납게 요즘 영화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이 볼썽사납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나는 생각한 대로 살기 위해 내 인생을 어딘가에 밀어 넣거나, 그 생각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고생을 자처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더욱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내가 뭐라고. 뭐 대단한 생각이 있는 것처럼 떠드는 게 염치없다.


잘난 체, 아는 체는 여기까지. 영화 얘기도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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