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 Sirāt

지옥의 길

by allen rabbit

"우리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한 말이 뭔지 알아?"


나는 영화 속 이 질문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고귀하고 거창한 말들이 오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대화 끝에 주인공 루이스가 한 말이다.


"우리 아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핸드브레이크. 였어."


루이스는 낭떨어지 옆에서 놀던 아들에게 위험하니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들이 탄 차가 미끄러지며 절벽으로 떨어지는 뜻밖의 사고가 일어난다. 그때 주인공이 다급하게 소리친 말이 “핸드브레이크!”였다. 위험을 피하려 했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그래서 대단하지 않은 그 말이 더 소름 끼쳤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집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며칠 전 어머니가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본가에 아버지가 혼자 남게 됐다. 아버지는 다리도 불편하고, 약간의 치매도 있다. 그래서 본가에 CCTV를 설치해서 가족들이 핸드폰으로 살펴볼 수 있게 했다. 화면 속의 아버지는 빈집에서 혼자 TV를 보거나 우두커니 한참이나 창밖을 보고 서 있곤 했다. 그래서 보는 마음이 애달프다. 어머니도 짠해서 CCTV를 못 보겠다고 투덜댄다. 아버지는 나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할아버지는 나 6살 때 돌아가셨는데, 나도 이제 갈 때가 됐지. 내 나이 86살이면 충분히 살았잖아."


영화 <시라트>는 차곡차곡 스피커를 쌓아 올리는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리고 신경을 긁는 듯한, 하지만 굿판에서 몸을 들썩이게 하는 것 같은 단조롭고 규칙적인 레이브 음악이 귀청을 울린다. 사람들은 홀린 듯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 그리고 카메라는 깎아지른 절벽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기기묘묘하고 황량한 이 절벽이 참 경이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의 착각이었다.


사막에서 벌어지는 레이브 파티. 그곳에 세상 착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루이스와 아들이 딸을 찾는다며 전단지를 나눠준다. 그리고 더 깊은 사막에 또 다른 레이브 파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루이스 부자는 딸을 찾아 무작정 히피 무리를 따라나선다.


차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을 하염없이 지난다.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또 전혀 낯설어서 눈을 뗄 수 없는 풍경. 우리들의 일상도 그렇다. 매일매일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매일매일이 다르다. 루이스가 딸을 만나겠다고 나선 길이었지만 길은 험하고 예상 못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차의 범퍼를 뜯어내고, 깊은 개울을 건너면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히피들이 도움을 청하러 간 빈집에는 TV가 켜져 있다. 화면에는 죄를 사하기 위해 메카를 도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막에서는 전쟁을 피해 탈영했든, 물을 건네주기 위해 돌아오든, 도움을 뿌리치고 염소를 몰고 달아나든 소용없다. 위험을 피해도 소용없고,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도 소용없다. 모두 끝끝내 같은 곳에 도착한다.


아들을 잃은 루이스를 달래기 위해 히피들이 춤을 춘다. 그러나 위로의 공간이었던 그곳은 지뢰밭이었고, 이들이 다다른 곳은 바로 죽음의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 길은 지옥의 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영화 제목 시라트(Sirat)는 이슬람에서 최후의 심판 날 모든 사람이 건너야 하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날카로운 지옥 위의 다리라고 한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듯 하지만, 파국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운명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될 이 길을 우리는 두 눈 꼭 감고 건너야만 한다.


영화 <시라트>에는 대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영화 속 대사는 마치 경구처럼도 들린다. 이 영화는 관객을 루이스와 함께 지옥으로 한발한발 끌고 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준다.


영화를 보고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이 영화가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루이스가 지나야 했던 그 길을 가고 있다. 춤을 춤며 히피 제이드는 소리친다. "볼륨을 높여. 다 쓸어 버려!" 그리고 그녀는 폭사하고 만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서역의 서천을 찾아가는 바리대기 공주의 고난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지옥에 간다면 그곳이 바로 영화 <시라트>에 나오는 이런 길이리라 생각했다.


삶의 마지막이라는 무게는 살아 있는 자들이 견뎌야 한다. 죽음에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86살이면 충분히 살았지.”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 나는 뭐라고 할까?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세요." 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듣는 말이라면?


내가 딸에게 마지막으로 하게 될 말도 "핸드 브레이크." 처럼 실상 아무 의미 없는 말은 아닐까?


오늘도 아버지는 텅 빈 집에서 물끄러미 창밖을 오래오래 보고 계신다. CCTV 화면 속 말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소설과 연극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들을 수 있는 예술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는 상대를 보고 그 마음을 추측할 뿐이다. <시라트>에서 아직 두려움을 느끼는 루이스의 아들에게 비기가 모히칸 가발을 쓰고 히죽 웃어준다. 그러자 아들은 차를 달리며 장난치는 히피들의 모습이 멋지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를 영화는 영상만으로 보여준다. 대사도 없고 설명도 없다. 이것이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었던 위대한 점이다.

여기에 오랫만에 느끼는 디지털과는 다른 질감의, 조금 거칠지만 아련한 온기가 있는 필름 화면도 반갑다. <시라트>는 영화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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