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2018, 코엔형제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블랙코미디라고 할만한 영화다. 하지만 황금을 찾은 노인이 ”급소는 피했어. 배에 구멍만 났어!“ 할 때나, 은행의 노인이 ”냄비에 맞았지!“ 할 때도 나는 웃지 못했다.
영화는 6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단편 소설집을 보는 듯한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면 떠올릴 법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1화 <버스터 스크럭스의 노래>는 총잡이, 2화 <알고도네스 근방>에는 은행강도가, 3화 <밥줄>에는 유랑극단이, 4화 <황금빛 협곡>에는 금을 찾는 사람이, 5화 <겁먹은 처녀>에는 서부 개척지로 향하는 포장마차 행렬이, 6화 <죽을 자만 남으리라>에는 현상금 사냥꾼과 마차가 나온다.
첫 편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노래하는 새라고 부르는 총잡이인데 시종 유쾌하게 노래한다. 총 솜씨도 좋아서 멀리 있는 상대의 손가락을 하나씩 날릴 정도이다. 그렇게 유쾌하게 악당들을 쓸어 버리는 이야기라면 좋겠지만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노래를 더 잘하고, 총도 더 잘 쏘는 총잡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서부 영화의 전설적인 총잡이를 생각해보면 이 선택의 이유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는 서부영화의 주인공으로 과묵하고 먼지투성이지만 사내다움이 뿜어나오는 총잡이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영화의 총잡이는 끊임없이 노래하고, 단정한 흰색 옷을 깔맞춤하고 잘생김과는 거리가 먼 덧니의 조그만 사내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제임스 프랭코가 맡은 은행강도가 도리어 우리가 생각하는 총잡이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냄비를 갑옷처럼 두르고 돌격하며 “냄비에 맞았지!” 소리치는 엉성한 은행 노인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교수형을 선고받는데 정말 운 좋게 살아난다. 하지만 다시 두 번째 교수형을 받게 되고, 관객은 이번에는 또 어떤 기막힌 우연으로 살아남게 될까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나란히 교수형을 기다리는 처지에 옆에 선 죄인이 울자 “처음이요?”하고 묻는다. 게다가 자신을 구경하는 예쁜 처자에게 미소를 짓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서부극의 환상을 지우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사지가 없는 배우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단장은 문득 계곡에 마차를 세운다. 그리고 무심히 커다란 돌을 개울에 던져본다. 영화는 돌이 물속에 가라앉는 것이나 그런 일을 하는 단장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자비라는 것은 본디 강요되는 것이 아니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고마운 비와 같습니다." 라는 자막이 나온다. 하지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일은 소용없다. 그러니 자비를 바라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겁먹은 처녀>에서는 평생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 없는 처녀가 서부 개척지로 향하는 마차 행렬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미래를 꿈꾸고, 웃음도 되찾는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러나 단 한 번의 성급한 판단으로 그녀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가 서늘한 운명의 비극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면 멋지게 보일 테지만, 관객의 기대를 철저히 좌절시킨다는 점에서는 잔인하기만 하다. 만일 내가 이 에피소드를 썼다면 당연히 마지막 씨퀀스는 주인공 여자가 늙고 노련한 아서가 아니라 마침내 마음을 열게 된 빌리 냅과 함께 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똑같은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마지막을 함께해야 관객은 이 이야기가 과연 비극으로 끝날지, 헤피엔딩으로 끝날지 조마조마하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기대는 아랑곳없이 진행된다. 그러니 아서는 빌리 냅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줄곧 이야기의 서술 방법 중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한다. 총잡이는 죽어서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고, 아름다운 계곡에 땅을 파고 한바탕 총질을 해 대는 인간들을 사슴과 부엉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황량한 도시에 서 있는 호텔은 마치 저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문을 굳게 닫고 있다. 모든 사건은 자연스러운 원인과 결과에 따르지만, 안타깝게도 이 인과는 관객의 바램 따위는 가차없이 무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영화 속의 인물이 된 듯한 착각과 함께 약간의 환상과 기대를 가지길 바란다. 그래서 주인공의 총은 적을 맞추지만, 적의 빗발치는 총알은 주인공을 비켜간다. 그리고 이런 환상과 기대가 현실의 가혹한 운명으로 어긋날 때 우리는 깊은 공감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카우보이의 노래>는 관객의 기대와 환상이 있을 자리를 의도적으로 없애 버렸다. 6편의 이야기에서 감정적으로 마음을 기댈 주인공은 하나도 없다. 웃으며 상대의 손가락을 날리는 총잡이에게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 사지가 없는 배우에게도, 너무나 위험한 순간에 때마침 웃음을 되찾은 처녀에게도 관객이 마음을 줄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다.
흔히 인생은 멀리에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전지적 작가 시점은 등장인물들을 모두 블랙 코미디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필멸하는 존재인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어처구니없게, 때로는 안타깝게도 ”죽을 자만 남“게 된다. 그래서 <카우보이의 노래> 속 다양한 군상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결론을 가진다. 하지만 이 예측 불가한 극의 전개는 관객의 기대와 환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결과다. 영화가 관객과 밀당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는 냉정하기만 하다. 이 가혹한 인생살이에서 영화조차 이리 냉소적이어야 할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