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나는 것

“Perfection itself is imperfection”

by Joon Yoon 연준

중학교 1학년. 당시 쫌 컸다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면 꼬맹이였다.

한국에 초청돼 온 저명한 외국 피아니스트이자 선생님의 일주일간 마스터클래스 끝맺음 공연.
운 좋게 기회가 주어져 그 공연의 일부로 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 K. 333 연주를 상기해본다.

유일하게 악보를 암기하지 못해 무대에서 연주를 멈춘 순간이었다. 올해 7월 바그너와 리스트의 도시, 바이로잇(Bayreuth)에서의 연주가 있기 전까지.

모차르트 소나타의 1악장 발전부는 거의 건너뛰고 재현부로 도착했다. 곡의 시작인 제시부로 돌아간 뒤 멈추었다. 정적이 흐른 뒤 곡을 다시 시작하고 어찌어찌해 악장을 끝냈다.

시종일관 사시나무 떨듯 연주를 마치고 어찌할 줄 몰라했다. 세상이 끝난 줄 알았다. 두려웠다. 고작 악보 조금 까먹었다고. 이게 뭐라고.

“이제부터 실수 안 하면 되는 거야.” 관중에 계셨던 저명한 선생님 한분이 다정히 웃으며 말씀해주셨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바이로잇 연주는 코로나 시대 첫 연주였다. 몇 개월 만에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코로나는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지만 불행 중 감사하게도 자기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요가도 시작했다. 전에는 내 귀에 스치기만 했던 재즈에도 빠졌다. 무대에 서기 한 시간 전 빌 에반스의 Peace Piece를 오마주한 즉흥연주와 30분짜리 스탠딩 시퀀스 요가에 심취한 뒤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최근 곁을 떠난 한 친구를 생각하며, 그가 야기했던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상기하며 쇼팽, 드뷔시, 그리고 쿠프랭의 소품들을 마쳤다.

연주의 핵심인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을 시작했다. 여섯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라벨의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가 세계 1차 대전에서 잃은 친구들에게 각각 헌정되었다. 두 번째 악장인 푸가는 특히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너무 맘 편히 연주를 한 걸까, 푸가에서 오래전 모차르트와 비슷한 식으로 악보를 까먹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 멈추지 않고 조금 (혹은 매우) 이상한 음들을 쳐가며 악장을 끝마쳤다.

놀랍게도 그다지 떨지도 않으며 담담하게 나머지 연주를 마치고 내려왔다. 코로나 시대에 연주할 수 있어 감사했고, 관중과 소통할 수 있어 감사했다. 악보를 까먹은 건 중요치 않고 자유로히 연주하는 순간에 충실했던 것에 만족했다. 연주를 마친 뒤 악보를 까먹은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이 달랐을까? 왜 전에는 두려워했을까? 틀려서? 실수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으며 왜 음악을 하는지 다시 고민했다. 기후위기는 턱밑까지 닥쳐 우리를 위협한다. 빈부격차는 나날이 심해진다. 인류 1/3은 전기를 못쓰고 10프로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위로 아래로 비교하면 끝이 없다.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그런데 고작 피아노를 친다고? 악보 조금 까먹었다고 그렇게 낙담한다고?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면 왜 이것을 하는 것일까.

수많은 콩쿨에 나가고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완벽하게 연주하면 되는 걸까?

내가, 그리고 클래식 음악계가 숭배하는 위대한 작곡가와 음악가들이 진정 그것을 원했을까. 그들도 인간이었다. 우리보다 더 위대한 인간이었다면 우리 내면을 더 깊숙이 통찰하려 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를 더 사람답게 만드는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완벽한 인간이란 없을 거라 확신한다. 그 위대한 인간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 한 것 아닐까. 그들이 써 내려간 음악은 인도적(人道的)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결국 내가 연주하는 그들의 유물은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한 연주가 아닌 ‘사람 냄새나는 연주’를 하고 싶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예술에서 완벽함을 찾는 건 완벽한 인간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 아닐까.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실수가 두려워지지 않는 듯하다. 이 또한 사람 냄새나는 것 중 하나기 때문에.

재즈 피아니스트의 대부 Thelonius Monk와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대부 Vladimir Horowitz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There are no wrong notes; some are just more right than others.”
”<틀린 음들은 없다; 조금 더 옳은 음들만 간혹 있을 뿐>”
-Thelonious Monk-


“Perfection itself is imperfection”
”<완벽함 그것은 미비함이다>”
-Vladimir Horowitz-


중학교 1학년 때 나 자신에게 다음부턴 실수하지 말라는 말 대신, 실수 쫌 하는 것 염려하지 말고 사람다운, 자유로운 예술인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다.


21. 09. 2020.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