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배워나가는 과정
나의 미국 생활을 가장 힘들게 했고, 지금도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고립감'.
한국에서는 느껴보기 어려웠던 감정이다.
한국에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관계에 둘러싸인다. 가족과 부대끼다 유치원이라는 첫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진짜 친구관계를 알아간다. 그렇게 나에게도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존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났고, 몇몇 친구들과 가까워졌으며,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친구들과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남은 친구들이 중학교 때 친구들, 고등학교 때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기숙사 생활을 함께하며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던 대학교 친구들. 그리고 특별히 더 잘 맞는다고 느껴졌던 인연이 되었던 직장 동료들 몇몇. 그렇게 나의 social circle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만들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직업 특성상 하루종일 아이들의 소음에 둘러싸이며, 퇴근해서는 남편과 아이, 그리고 아이를 돌봐주는 친정부모님과의 관계가 있었고, 주말에는 친한 친구들과 오랜만에 자유시간을 갖거나, 캠핑을 가거나, 또는 언니네 놀러 가 조카와 우리 아이를 같이 놀게 해주곤 했다. 한국에서 나 혼자 있는 시간은 말 그대로 정말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혼자서도 꽤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결혼 전에는 혼자 해외여행도 가 보고, '뭐든지 혼자 할 수 있어야 여럿이서도 즐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카페나 음식점도 혼자 잘 갔다.
미국에 오기 전, 나의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았다. 새로운 세계이니, 새로운 관계가 있겠지? 하며 머릿속으로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운동을 하며, 등등 예상치 못하게 운명처럼 만들어지는 친구를 상상했다. 외국인 친구들은 또 어떤 친구들이 만들어질까. 또는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더 넓은 세계로 나가보자!
하지만 나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으며,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지 않았다. 가족 중심이라는 미국 사회 특성상 더 그런 것 같았다. 우리 집은 500 unit이나 되는 대단지이지만 한 번도 아이들이 떠들거나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밤 8시만 되면 대부분의 집에서 불이 꺼지고, 낮에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이러한 환경에서 집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숨이 막혀왔다. 밖에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길거리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나와 친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대학생 시절 호주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어학연수를 떠올리며 더 적극적으로 meet up, adult school, community college, esl class 등에 나가 보았지만, 모두가 생업전선에서 일하거나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혼자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모두 조용히 집에 가기 바빴다. 30대 이상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갑자기 친구가 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가장 친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같은 주재원 와이프분들은 딱 한 분 만날 수 있었는데, 어린 아기가 있어 외출을 부담스러워했고, 교회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나처럼 관계에 대한 갈증이 없어 보였다. 한인 운동 모임에 나가보기도 했지만, 평일 오전시간에 운동을 오는 분들은 대부분 60대 이상 분들이었고- 이분들은 높은 확률로 예전 한국 어르신들의 사고방식을 갖고 계셨다.
갑자기 내 삶에서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제로 베이스 상태에서 누군가와 '편하게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결혼할 이성을 찾기 위해 '자만추'는커녕 돈과 시간, 노력을 투자해 '듀오'에 가입하고 끊임없이 발품을 파는데도 찾아지지 않는 기분이랄까. 일단 누군가와 접점을 만들기도 쉬운 일이 아닌 데다, 만난다 해도 그 사람과 내가 결이 맞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어딜 가나 결이 맞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모집단이 커서 확률적으로 높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좋은 아이 친구 부모님들을 만나게 되어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하고 가까워져도, 그 관계가 정말 용건 없이 연락할 수 있는 관계까지 되기는 어려웠다. 댄스팀에서 그나마 좋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모두 외국인이다 보니 단편적인 대화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그리고 생각보다 미국인들은 많이 조심스럽고 shy 한 편이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단순한 상황 설명을 하더라도 영어로 할 때와 한국어로 할 때 갈증의 해소도가 명확히 다르다 보니, 한국친구와 대화할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와서 알게 된 것인데,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즉 언어적 장벽이 없는 사람들도 중학생 이상부터는 대부분 같은 인종끼리 모인다고 한다. 아무래도 비슷하게 생긴,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와 남편을 각각 학교와 회사에 보내고 나면 그 둘이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허다했고, 이런 날들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우울증을 호소했다. 나는 이런 시간들을 필사, 요리, 영어공부, 운동, 영상 등에 몰두해보려 했지만 우울감을 떨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심할 때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기분까지 들었다. 삶에서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친구들과 카페 가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가벼워지기도 하고, 또 가보고 싶은 맛집이 있으면 같이 가자! 하고 만나서 술 한 잔 하곤 했는데, 여기선 그 모든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자니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나는 이 땅에서 '언어가 미숙한 아시안 무직 아줌마'로밖에 설명이 안되다 보니, 카페에서 종업원이 친절하지 않게 대할 때, 음식점에서 다른 테이블과 다르게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메뉴 주문을 할 때 내가 버벅거릴 때 더 작아졌다. 그러한 시간들을 하루 동안 혼자 견디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오면, 나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은 소파였다. 하지만 소파에서 끊임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나의 자존감은 끝도 없이 추락했다. 미국에 오면 다른 관계가 단절되어 가족과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 된다던데, 지극히 한국적인 남편회사는 평일은커녕 주말까지 사람을 놔주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밤 11시에도 아직 남편은 회사다. 남편과 나는 서로 양극단의 어려움에 놓여 있고, 이 문제는 일 년 반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 드넓은 땅에서 왜 나는 새장 속의 새처럼 갇힌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없이 시도해 보아도, 그냥 안된다고, 포기하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이렇듯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외로움과 고립감이 끝나지 않는 시간들은 때로는 나를 슬프게 했다가, 화나게 했다가, 성찰하게 했다가, 다른 사람들은 어찌 견디는지 궁금하게 했다가, 때론 물속에 잠겨있는 것 같다가, 모든 것이 꿈이었나 자다 일어나면 화들짝 일어났다가, 또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괜찮아졌다가, 다시 괜찮지 않음을 확인해 가는 불안정한 과정이었다. 나는 항상 인복이 많고 그것에 감사하며 내 삶을 꽤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미국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내 삶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왜 나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 편하게 아무 이유 없이 연락해서 만날 친구 한 명을 사귀지 못한 것인지, 운이 나쁜 것인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이 30이 넘도록 친구를 갈망하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 여러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꼭 친구가 아니라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시끌벅적한 아이들이라도 구경할 수 있다면 이 무인도에 갇힌 느낌이 해소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유튜브에 '주재원 와이프'를 검색어로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보내나 검색해 보고, 여러 네이버 카페에 '우울감' '외로움'을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통찰을 했나 알아보기도 하고, 실제로 카페에 글을 올려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Chat GPT에게 나의 어려운 감정들을 털어놓으며 몇 시간씩 상담을 받기도 했다(실제로 Chat GPT는 미국생활에서 내가 모르는 것들이 생길 때, 운전할 때 등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친구다). 결론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이런 상황이 꽤 괜찮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편이 미국에서조차 해외출장을 간 날, 오늘 나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는 나의 말에 해외살이를 오래 한 지인은 “그냥 죽는 거지 뭐~ 난 어릴때부터 응급실도 혼자 갔어.” 라는 말을 하곤 했다.
오늘도 나는 한국에 있었다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여러 가지 심오한 삶의 이유와 나라는 영혼의 존재 이유에 의구심을 품으며 하루를 견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