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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an 05. 2023

아차산 정상에서, 2022년의 이터널 선샤인

구원에 온점을 찍으면

어느 겨울날 갑자기 이끌리듯, 막 떠나려는 ‘몬톡’ 행 기차에 급히 올라탄 남자. ‘이터널 선샤인’의 첫 장면처럼, 2019년 1월 1일 새벽 막 열아홉에서 스무 살이 된 난 새벽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한순간 이제 성인이라는 패기에 못 이겨 패딩에 장갑, 목도리를 챙기고 ‘그냥’ 아차산으로 향한 것이다. 등산로로 가는 길도 모른 채였다. 참 무모했지. 지하철역에서부터 등산 가방과 등산화를 신은 어른들을 따라, 무작정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산길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앞만 보고 가다 보니 어둠 속 알록달록한 팔각정을 만났고, 그 앞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며 잠시 감탄했다. 조금 더 걸으니 어느새 하늘은 밝아진 채였고, 풍경이 탁 트이는 곳 즈음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전망대가 나타났다.


뒤늦게 도착해 이미 빼곡한 등산객들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행과 함께였다. 아이, 가족, 연인, 친구. 그 사이에서 난 혼자 이리저리 밀리고 치였지만, 뜨는 해를 보며 기쁜 탄성을 질렀다. 그게 내가 삶에서 행한 가장 큰 일탈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 방에 내가 없는 걸 본 엄마는 전화로 너머로 화를 내셨지만, 들뜬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온전히 내 결정으로, 내 용기로 떠난 길이었으니까. 그렇게 난 다소 충동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성인이 된 기념을 한 셈이다. 그때의 난 정말 겁이 없었나 보다.


2022년 1월 1일, 다시 아차산을 찾았다. 3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남자 친구 K가 같이 새벽 산행에 나서 주었다. 그 애는 이번이 생애 첫 새해 해맞이라고 했다. 늘 자고 일어나면 해가 떠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고. 같이 일출을 보자는 말에 거절이 돌아오면 혼자라도 갈 생각이었지만, 매번 쉬고 싶다던 사람이 웬일로 이번엔 좋다고 대답해준 덕에. 영화 삽입곡을 들으며 산으로 가는 길, 창 너머의 밤 풍경과 멀찍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 삼 년 전과 겹쳐져 날 미묘하게 떨리게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던 넌 돌산도 씩씩하게 올라줬다. 어두운 산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전처럼 언덕 위 팔각정을 지나 해맞이 광장에 도착했을 때, 해가 뜨기까지 한참 남았다는 걸 잊을 만큼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졌다. 어둠 사이로 나직하게 들려오는 말소리, 아득하게 보이는 서울의 불빛, 도시 위로 새초롬 떠 있는 그믐달까지 빠짐없이 낭만적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의 기다림을 시작했다. 새해 해가 뜨기까지 장장 2시간가량을 한 자리에서 서 있으니 겨울 산의 찬 공기에 손발이 얼고 괴로웠지만, 우리는 남극 펭귄들처럼 손잡고 꼭 붙어가며 기다림을 견뎠다.


머지않아 동쪽 산등성이가 희미하게 붉어져 갔다. 그 붉은 기운은 천천히 오랫동안 차오르며 어둠을 밀어냈다. 이렇게나 긴 기다림 위로 해가 뜨는구나. 아침 해를 지평선 위로 틔워내는 새벽의 노력이 이토록 끈기 있고 아름답구나. 짙은 유화 같은 밤하늘 속, 여명이 수채화처럼 번져나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질 못하겠더라. 곧 색은 빛이 됐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윤곽이, 옷 색깔이 드러났다. 하나같이 새해 아침의 빛을 받으며 동쪽 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같은 곳을 바라봤다. 산 정상에서, 해를 기다리며, 추워서 호호 부는 입김과 동동거리는 발에 담긴 염원과 기대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뜨는 해에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은 한마음으로 먼저 깨어나 웅성거리며 아침을 재촉한다. 이보다 더 밝아질 수 있을까, 지칠 때쯤 해가 떠올랐다. 정말 작았지만 그 찰나가 모든 염원과 기다림의 끝이었다.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이 순간만은 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이 아닐까. 모두의 시선이 닿은 그곳, 동트는 하늘, 완연한 아침 위로 새들이 날았다. 오늘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는 너의 말에 보답하고 싶었는데, 모든 게 완벽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네 생애 첫 새해 일출 현장에 있을 수 있어 영광이야. 새벽부터 아침까지 긴 기다림을 견뎠던 건 핫팩도 장갑도 머플러도 아닌 너의 손, 눈, 목소리였어. 우리 앞으로도 춥고 긴 어둠을 함께 지나 해 뜨는 아침을 둘이서 맞이하자, 속으로 소원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모두가 뜨는 해를 향해 있는 그때, 스물셋의 나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 사이에서, 스물의 내가 오도카니 서있는 모습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이미 가 봤던 길에 밴 기억은 힘이 세서, 언제고, 내가 그곳을 다시 찾는 순간부터 생명을 얻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를 쫓아 간 산길도 내가 밟은 길이었기에. 그건 미래의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끈 운명적인 목소리, 내가 이곳을 이미 올랐다는 확신과 자부, 내가 아는 길이라는 안도. 어떤 형태로든 오늘, 어둡고 좁은 길을 걷는 나의 가슴속에서 엷은 빛으로 되살아났다. 스무 살의 낭만에 가득 차, 천진난만하게 걸음을 옮기던 내 발자국을 다시 되짚으며 난 산을 올랐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나 내 기시감이 그보다 강하구나. 이 오르막에 그날의 내가 그대로 남아있구나.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나는 감정이 버거울 정도로. 스무 살과는 너무 달라진 지금, 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길래 그때의 내가 이토록 안쓰럽고 애틋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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