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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an 06. 2023

땅콩 트럭의 노스탤지어

나의 작은 도시

유난히도 찬바람이 불던 날, 바삐 옷깃을 여미던 해질녘. 건너편에서 코끝에 닿는 쌉쌀한 향기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땅콩 내음. 그 향기와 함께, 언제 보았을까-희미한 기억 속에 낯익은 푸른빛은 또렷이 살아왔다. 횡단보도 너머에서  쿵쾅거리며 가슴이 뛰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건너던 건널목, 그리고 가을이 지나가고 봄이 지나오기 전까지 그곳을 지키던 작은 파란색 땅콩 트럭. 어릴 적 그 옆에 계시던 아저씨께 늘 해맑은 웃음으로 인사드리던 건 그분이 조금씩 나눠주시던 구운 땅콩이 먹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내 인사에 정겹게 화답해주시던 푸근한 너털웃음 때문일지.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태연하게 아저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땅콩 만 원어치만 주세요." 드셔 봐요, 하고 한 줌 땅콩을 가득 손에 손으로 쥐어주시던 정은 그때와 같았다. 달라지신 게 없구나, 안심하던 찰나. 열 과 스물의 공백은 너무 컸던 것일까, 훌쩍 커버린 나를 아저씨는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셨다.


"아저씨, 저 기억 안 나세요? "

"허허허, 기억이 잘... 모르겠군요"

"아, 그렇구나, 제가 너무 커버려서 그런가 봐요. 아하하!"

애써 웃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긋난 시간을 땅콩 향기가 이어주었나 보다. 숱하게 지나치던 상가 앞 횡단보도, 그곳에 겨울마다 땅콩을 한가득 싣고 찾아오던, 땅콩 향을 가득 실은 트럭. 있다가도 사라질 듯 색이  바랜 파란 차에서 실려 오는 고소한 냄새. 그 옆에 늘 같은 점퍼에 같은 자세로 먼 곳을 쳐다보고 계시던 아저씨. 그날따라 땅콩 아저씨의 턱 끝은 유난히 까칠하고 희어 보였다.


시침이 갈라놓은 기억. 익숙함 속에서 이유 모를 이질감이 머무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빛이 다 바래 버린 옛날을 거짓말처럼 마주한 그 순간, 고소한 냄새 한가득 필름 영화 같은 과거의 편린. 양손에 들린 땅콩 봉지의 더운 무게를 느끼며, 향수병을 앓는 듯 멍하고 가슴이 미지근하게 달아올라 정신이 아찔했지만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썼다. 길가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이 즐거웠던 열 살의 저를 스무 살의 어른인 내가 동경한다. 그리움이라는 슬픈 감정이 뜬금없게도 땅콩 향기를 닮았다니 웃음이 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손끝에서 부서지는 푸석한 껍질 그뿐으로도 지난날로 되돌아가는 회상의 운명은, 거부할 수 없지만 슬프도록 매력적인 일이 아니던가. 거기서 맞닿는 열과 스물은 서로 쌉싸래한 미소를 마주 짓는다. 적어도 혀끝에서 고소한 땅콩의 맛이 아주 사라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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