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야 Mar 08. 2024

건조기와 아타카마의 환생

겨울이 다 가지도, 봄이 채 오지도 않은 애매하고도 시린 계절이었다. 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마친 뒤, 취준도 졸업도 미룬 채 식당에서 매일 일을 했다. 그 시기 기나긴 열 시간의 근무 중 건조기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이 가장 기다려졌다. 달칵, 동그란 문을 열면 밝은 빛 아래 얌전히 놓인 행주들과 앞치마 더미가 반가웠다. 통 안에 팔을 담가 보송한 촉감과 온기를 잠시 만끽하다, 한가득 안아 밖으로 덜어 냈다. 품에 안긴 가볍고 따끈한 천들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심리적 안정감을 후각적 심상으로 표현하면 분명 잘 마른빨래의 냄새일 것이다. 기특한 것들. 고맙게도 내가 저들을 가장자리가 맞닿도록, 정성스레 전부 갤 때까지도 식지 않는다.


환한 은빛 통 안에 팔을 뻗을 때, 손 끝으로 다 마른빨래를 매만질 때 지구 반대편 아타카마 생각을 했다. 호스텔 테라스로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살짝 찌푸리던 눈. 그만큼 밝고 뜨거운 태양. 비누로 열심히 문질러, 대충 짜 빨랫줄에 널어놓은 민소매와 양말. 장을 보러 외출했다 돌아오면 완벽하게 건조된 옷들을 보며 지었던 웃음. 모래로 바삭바삭하던 바닥과 적당히 달아오른 공기. 아타카마에서 보낸 모든 시간은 뜻밖에도 레스토랑의 모노톤 건조기를 통해 재현되었다. 그 온도와 촉감만으로 좁은 창고 안, 그보다 더 좁은 건조기 통 안에서 날 안아주던 붉고 광활한 사막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아타카마는 그렇게 내게 건조기를 선물했다. 몹시 특별한 건조기다. 꽤 자주 지쳐 축축이 젖고 마는 나를 꼭꼭 짜, 따듯하게 말려 주는 그런 기계. 겨우 잘 마른 천 한 장에 닿는 것만으로도 슬픔을 잊는, 조건 반사를 각인시킨 다정한 사막. 한때 깊은 물아래 잠겨 있다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장소가 되었다는 아타카마를 떠올리며 기도한다. 언젠가는 내 무수한 눈물과 슬픔도 따듯한 햇살 아래 말라가겠지. 물이 있던 자리에 사막을 만든 신이라면 나 역시 결국 그리 해주시겠지. 마침내 그날이 오면 나도 누군가의 식어가는 세상을 온통 따스하게 채울 수 있는 또 하나의 붉디붉은 아타카마가 되겠지.

작가의 이전글 긴 책을 읽듯 사랑하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