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님의 오카리나

산란한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들

by 모니카

나에겐

마음이 몹시 산란하거나 화가 날 때 스스로 내리는 처방이 있다.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기, 표현하지 말기, 나에게 말 걸기.


씻고 먹고 일하고 잠자고.... 되도록 주변 사람들이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상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지만 자동으로 움직이니 일이 밀리지 않아 좋고, 몸이 바쁘니 생각은 제풀에 지쳐 꺾여버린다.

표정이야 좀 변하겠지만 헝클어진 마음을 밖으로 쏟아놓지 않도록 단속한다.

상태가 안 좋을 때 밖으로 나온 말 들은 사실 내 진심이 아니었을 때가 많다.


산란한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나에게 말 걸기다.

'괜찮아, 순간이야, 곧 나아져' 하며 나를 다독여 준다.

그러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온기가 올라와 나를 보듬어 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위의 것들은 결코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게 묘하게 쉬워진다.

몹시 힘들게 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세윌이 터득한 공도 있다.


산란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나이 들면서 터득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마음을 포근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진이 있으면 더 좋고.

이른 아침 울타리에 활짝 핀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 초가지붕 위에 샛노란 호박꽃, 탐스렇게 자란 가을배추밭, 늦여름 밤의 풀벌레 울음소리...(다 내 어릴 때 보던 것들)

요즘엔 거기에 합류한 것이 더 있다.

온갖 것을 참견하는 내 고양이 연두빛 눈을 생각하거나, 시적이고 아름다운 글이나 마음이 따뜻해 지는 글을 읽는 일이다. 알퐁스 도데 단편집이나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같은.


어젯밤에도 마음이 산란했다.

브런치에 올릴 글을 마무리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다.

읽고 난 아들이 '뭔가 몹시 아쉽다'라고 평했다.

가슴을 쿵 치며 좌절이 몰려왔다.


"쓰면 쓸수록 탄력이 붙는 게 아니라 점점 자신이 없어져."

"엄마, 음악도 그래요."


곡 하나를 창작하기 위해 밤을 새우던 아들이었다. 그때는 잠 좀 자면서 하라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애를 써 이뤄진 것들인데 내놓기 부끄럽고 창피한 것은 똑같다고 위로해 준다.

아들의 고충을 들은 교수님도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학사, 석사 때의 작품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하셨다면서 나에게 힘을 준다.




뒤척이며 나를 다독여 본다.

평온을 주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몇 해전 교회 어머니들하고 찾았던 '성 요한 피정의 집'에 계시는 로렌스 수사님이 떠올랐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올라가면 깊은 산자락에 조용히 자리 잡은 성 요한 피정의 집이 있다.

제일 먼저 하얀 예수님 동상이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려 반겨주신다.

벌써 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 당시 코로나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병들고 꽁꽁 닫힌 몸과 마음을 가지고 피정의 집을 찾았다.


그곳에는 오카리나를 부는 수사님이 계신다.

우리를 인도하시며 오카리나를 불어 주셨는데...... 연주 실력이 매우.... 서투셨다.

첫 음 잡기도 어렵고 노래 부르는 중간에도 음정은 자꾸 틀려서 반복해야 했다.

우리는 마스크 속에서 오랜만에 맘껏 미소를 지었다.(마스크가 정말 고마웠다)

그분의 웃음소리는 어땠는지.

나는 그렇게 천진스럽고 맑은 어른의 웃음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영화 속 수도원의 근엄하고 무거운 표정의 수사님이 아니라 개구쟁이(실례) 소년 같은 표정과 맑은 읏음소리가 탁해진 마음을 샘물처럼 씻어주었다.


침묵하며 산길을 걸을 때도 멈출 때마다 오카리나를 불어 주셨다. 그때의 음률은 마치 산새소리 같았다.

맑고 찬 산공기와 곳곳에 십자가를 만든 마른 나뭇가지들, 두텁게 쌓인 나뭇잎 밑에 뾰족뾰족 솟은 얼음들...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수사님의 안내로 Labylinth(레버린스, 미로, 미궁)를 돌았다.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면 놓여있는 돌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밟으며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잡념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우리 옆에서 수사님은 서툰 솜씨로 계속 오카리나를 불어주셨다.

경건해야 할 그 순간이 주책스럽게 왜 그렇게 즐거윘는지.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바삐 바삐 돌았다.


그사이 또 한 분 수사님이 손수 지어주신 점심과 난로 위에서 맛있게 익은 군고구마와 차를 마셨다.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깔깔 웃기도 했다.

수사님도 밝게 웃으셨다.

정말 오랫만에 웃었다.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건 역시 동심과 순수와 자연인 것 같다.


'나의 목소리 주님귀에 곱게곱게 울리길...'

소년같이 노래 부르는 수사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밤늦도록 그때 그 순간들을 떠올리니 산란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다.

오카리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그렇게 맑게 늙어가고 싶다.

.

.

.


수사님, 오카리나 연주 솜씨가 서툴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이전 05화저 기억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