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때를 아는 지혜
그건 나의 지혜가 아니었다.
폭설이 내리자 이제 1막을 내린 앞동네는 새하얀 눈밭이 되었다.
아침에 베란다 동창으로 햇빛이 몰려 들어오면 얼른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창 너머로 내 어릴 적 보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눈밭이 펼쳐져 있다.
어스름 저녁이면 불 빛 대신 눈 빛이 환하게 어둠을 밝혀준다.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로등 몇 개가 깜빡이고 있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깜빡깜빡 빛을 반짝이며 제 할 일을 시작하고, 낮 12시가 되면 일제히 멈추고, 다시 1시가 되면 열일을 다하는 포클레인만 아니면 나는 지금 옛 추억에 흠뻑 빠져 있을 것이었다.
올망졸망 단독 주택의 막을 내린 앞동네처럼,
이제 고층아파트의 제2막을 시작하려는 앞동네처럼,
나도 내 인생 제1막을 내렸다.
나도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수적천석(水滴泉石 아무리 작은 노력이라도 꾸준히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등의 많은 격려로 시작했다.
그 축복대로 번성하여 기고만장하기도 했다.
내심 항용유회(亢龍有悔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후회할 때가 있다)를 되뇌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한 곳에서 20년을 지키다 보니 저절로 지정석이 되어 두 번의 번영도 어려웠지만 추락도 쉽게 오진 않았다.
마침내 나는 '콩코드 오류'(잘못된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하기 위해 밀고 나가는 행동)로 까지 비약해서 끝낼 정당화를 갈구했다.
그렇게 안정과 변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드디어 나는 인생 1막을 내렸다.
내가 단호히 인생 1막이라고 칭하는 것은 내 젊은 날 30년은 모두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가지 일로 보냈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 끝낼 때를 결정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모든 업종이 그렇겠지만 학원도 철거해야 할 시설과, 책상, 의자, 많은 책등을 처분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 같이 공부한 학생들의 차후 대책도 고민해야 했다.
내 결심과 계획대로 마지막 중 3 기말고사를 끝내주고,
과감히 11월 30일에 철거하기로 업체와 계약해서 어김없이 시행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간판과 창문 썬팅까지 깔끔하게 떼어내 나의 흔적을 지웠다
거기엔 큰 공로자가 있다.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 항상 내 발목을 잡는 것은
'그럼 그 뒤에 뭐 할 건데?'였다.
돈을 벌여야 할 뭔가를 말하기도 하지만,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 즐겁게 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많은 것에 기웃거리고 배우고 수료하고 하다 브런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작가 도전에 한 번이라도 고배를 마시게 되면 다시 일어날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합격 노하우를 파고들었다.
다행히 한 번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올해 8월 18일이었다.
3개월 동안 주 2회 연재를 하며 항상 흡족지 못하지만, 일단 내가 즐기는 일을 찾았다.
혼자 쓰는 글이 아닌 남이 봐주는 글은 확실히 도전이며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인생 1막을 내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나는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과 끝냄에 있어서
내 의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아니 체험하고 있다.
항상 하느님이 동행하고 밀어주고 끌어주셔도 매번 잊어버리는 나지만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심을 또 알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 알게 되어 걱정하던 철거문제도 시에서 지원받고, 세무 관계도 무료로 대행받았다.
더구나 우리 학원을 인수할 원장님도 예비한 것처럼 나타나 주었다.
그동안 숱하게 이제는 끝내고 싶은데, 그래서 무진 애를 쓰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폐업 진행이 마치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혹시나 '경솔했나' 하는 후회를 불식시켜 주었다.
끝낼 때를 허락하시니 나의 노력은 거저였고 마음도 평안했다.
학원을 정리하고 주말을 맞았다.
간사하고 연약한 믿음이 주말이 끝나고 다시 새 날이 되면 어떤 기분일지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 '시원섭섭하죠?'라고 묻는다면 '시원'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늦은 나이라고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결단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
진정 앞으로 어떤 기쁨을 주실지 궁금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