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꿈

딸을 대처로 보내고 싶은 마음

by 모니카


내 세계가 넓어지고 있었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생기고 집에 있는 시간이 줄고 자연히 식구들 얼굴 마주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시험 때면 의례 저녁을 먹고 친구집에 모였다. 옥수수, 고구마, 감자, 과자까지 잔뜩 쌓아놓고 먹고 떠들다 밤이 깊어 그제야 책을 펴고 꾸벅꾸벅 졸다 이리저리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밤을 새워 공부했다.

새로 오신 영어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1등을 놓치기 싫어서 올빼미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하품을 하며 일어난 친구들은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것은 자랑거리이기는 하지만 친구를 사귀는데 중요한 조건은 아니었다.

내 친구들은 성적이 형편없는 친구도 있었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서 그런지 극히 말이 없는 친구도 있었고, 같이 잘 놀다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친구도 있었다. 중학생이 되니 끼리끼리 뭉치게 되어 그 집단 속에 끼는 것은 참 중요해졌다. 그 무리 중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저절로 걸러져 잘 때를 빼고는 거의 붙어 다녔다.

유독 눈에 띄는 친구들도 있었다.

공부는 뒷전이고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나 늘 소설책을 달고 사는 친구가 있었다. 나 그 애의 엄청난 다독을 존경스러워했다. 그 친구, 혜숙이는 이다음에 훌륭한 작가가 될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또 말만 하면 배꼽을 잡고 뒹굴게 웃기는 친구가 있었는데 좌중을 즐겁게 하는 그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타고난 예쁜 얼굴의 친구나 부유한 집안의 친구가 부럽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마음속 어딘가에 내팽개쳐 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부모님의 관심과 보호 아래 있지만 혼자서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들은 놔두면 더 잘 컸다.

막냇동생은 아직 엄마 품에 있지만, 언니는 언니의 세계로 나는 나의 세계로, 동생들도 각자 제 나이에 맞춰 커 갔다.

자애로운 부모나 훌륭한 스승이 쪼아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때가 되면 알을 깨고 나왔다.


자식들이 점점 튼튼한 자기의 성을 쌓는 동안, 부모님의 크고 견고했던 성은 점점 좁고 작아졌다.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어깨도 예전처럼 넓지 않았다.

육군 상사인 아버지가 장교로 진급하는 길은 없을 것이었다.

상사라는 계급이 부대에서 경험과 리더십에서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고뇌를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셨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눈빛과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에 아버지의 월급이 충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요구가 돈 때문에 안 된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아휴 니 아버지는 이북 사람이라 생활력이 강해' 엄마가 자주 하는 이 말을 나는 '아직은 풍족해'를 대신하는 말로 알아 들었다.

엄마는 알뜰한 편이 아니었고 당신의 몸치장과 옷 구입도 즐기셨지만 엄마의 자존심이었을까? 돈 문제는 자식들에게 눈치를 보이지 않으셨다.

두 분이 우리가 잠든 사이 경제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셨더라도 해가 뜨면 엄마는 여전히 비게가 푸짐한 김치찌개를 끓이셨고 아버지는 꼭 한 숟갈만큼만 남기시고 여전히 믿음직한 표정으로 출근하셨다.

그 한 숟갈의 밥과 찌개는 아버지의 자취였다. 푸짐한 한 그릇보다 아버지가 남겨준 것은 너무 맛있어서 서로 먹으려고 경쟁했다.


중3이 되었다.

우리 학교는 중고등 학교였다. 인문계를 지망하는 사람은 본교에 진학하고, 많은 수의 여학생들은 근처 여상에 진학했다.

그리고 소수는 큰 지방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학교에 오셨다.

나를 C시에 있는 군자녀를 위한 고등학교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미리 귀띔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둥절했지만 싫진 않았다. 그때도 나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과 흥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과 차별화된다는 것에 우쭐했던 것 같다,

내가 성적이 꽤 좋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타 학교로 보내는 것을 아까워하신 것도 나를 으쓱하게 하는데 한 몫했다.

이리하여 나는 초등학교 반과 중학교 시절을 보낸 지방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즈음

우리 가족은 또 이삿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집 앞에 통나무가 산처럼 쌓여있는 기차역과 철길 건너 작은 산이 보이는 좀 한적하고 낭만적인 집이었다.

옛날 기와집이었는데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이 집에서도 우리는 안채를 쓰고 집주인인 노부부가 건넛방에 사셨다.

할아버지 이름은 조 활이었다.

집주인 할아버지 이름도 인상적인 이 집은 우리 가족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일을 겪은 집이기도 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