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었던 나의 고교시절
고등학교 시절이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그리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나는 도청소재지가 있는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군인자녀를 위한 학교답게 전교생이 군인자녀가 90%, 민간자녀가 10% 정도 되었는데, 신입생 모집 시 우수학생을 선발한다는 목적으로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군인자녀는 다 합격되었다. 전국 단위로 모집하기 때문에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에 서울의 유명대학 진학률도 높고, 특히 육군사관학교 합력률은 전국 탑을 기록하고 있어서 높은 수업료를 내고 진학하는 민간인 자녀들도 꽤 있었다.(군인 자녀는 수업료와 기숙사비, 식대가 무료나 대폭 감면되었다)
이사가 잦은 군인 자녀의 교육 안정화와 진로지원이라는 특수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큰 목적은 유능한 군간부 양성을 위한 것이었을 거다.
실제로 수업과목에 사격시간도 있어서 나는 생전처음 몸이 진동하는 큰 총의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언니는 학교대표 사격선수였는데, 큰 대회 때마다 상을 휩쓸어서 아주 유명했다.
또 우리 학교 학생들 명단은 모두 북한에 넘어가 있어서 전쟁이 나면 타격 대상 1번이라는 그럴듯한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도내 체육대회나 소풍 등 학생들이 움직일 때는 군용 트럭이 와서 실어 날랐다.
물론 나의 아버지가 이러한 학교의 특성을 다 아시고 보내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공부 잘하는 딸을 좀 더 큰 물에서 놀게 하고 싶고 마침 그 학교에 기숙사가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보내셨을 것이다.
나도 새로운 도시의 큰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기숙사 입소 날,
엄마가 만들어준 하늘색 이불과 교복, 사복과 속옷, 개인용품. 세면도구....
부모님은 취사도구만 빼고 혼자 살기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나를 낯선 도시의 낯선 학교 기숙사에 남겨두고 가셨다.
그날 밤 나는 기숙사 이층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내가 덜 성숙했고 생각보다 훨씬 어렸는지는 모르지만, 뭐든 첫인상과 느낌이 있는 법이다.
신입생들은 군부대가 강원도에 많아서 그런지 강원도 지역에 있는 중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한 중학교에서 보통 서너 명씩은 왔고, 이미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같은 학교 출신 선배들은 마치 친동생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눈에 띄게 자기 학교 후배들을 챙겼다.
나처럼 혼자 입학한 사람도 많았기에 '곧 사귀면 되지'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기숙사 내에는 이런 각오도 무색하게 하는 어떤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낙인과도 같았다.
공식적으로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서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서열은 없었다. 부모의 계급이 선발요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것이 원래 힘이 강한 법이다.
'별자리의 아들' '대령의 딸' '상사의 자식'...
군인 자녀들이 모여있는 기숙사란 특수한 환경 속에는 군 조직의 위계가 보이지 않게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부모의 계급이 자녀의 사회적 위치처럼 작용하는 듯했다.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심리적 거리감을 장교의 자녀든 부사관의 자녀든 서로 묵인, 아니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키가 작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S는 별을 단 아버지 딸이라고 했다.
항상 큰 통기타를 메고 다녔는데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은 나타나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외박을 나갔지만 S는 주마다 서울(그 애의 집)에 갔고 수업시간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기숙사도 별도의 방을 배정받았다는 말이 있었다.
쳐다보는 학생들은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S가 눈을 감고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애를 이미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학교의 분위기는 기숙사와는 달랐다.
장군 출신이긴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을 아들 딸이라 부르며 집 떠난 우리들을 부모 대신 사랑한다 하셨는데,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적어도 내 눈에는, 아버지의 계급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에 가시지 않는 생채기를 낸 선생님이 있었다.
N은 대령의 딸이었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갑자기 수학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
나는 수학을 어려워했고 성적이 안 나왔기에 그런 현상에 민감했는데, 우연히 N이 수학담당인 담임 선생님의 과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는 주말이 아니면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꼼짝 못 하고 자습을 하는 시간에 N이 자주 외출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참지 못하고 담임 선생님한테 달려가 따졌다.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자기 반 학생 과외를 해 줄 수 있어요? 걔한테 유리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 아녜요? 공정성이 훼손되는 거 아녜요?"
조용히 듣고 있던 선생님은 점점 소리가 높아지면서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꾸짖었다.
내가 들은 말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나는 형편없이 초라해져서 교무실을 나왔다.
건방지고, 따질 시간에 공부나 더 하고, 억울하면 너도 하면 되지 않냐!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뒷 수업을 모두 제치고 들국화가 만발한 학교 뒷산에 올라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어둑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나의 행동이 아버지 계급 간의 차별을 스스로 인정한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책했다.
경제적 부담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여지없이 건드린 선생님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낮은 서열 자리에 스스로 앉아버린 것 같아 나 자신이 미웠다.
그 후 수업시간이면 창문 밖에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연보랏빛 들국화가 내 처지 같아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이렇게 비관적이고 깊은 암울 속으로 빠져들게 된 큰 원인은 있었다.
새로운 학교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되어 가고 있던 1학년 말에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기상 벨 소리에 잠이 깨고, 벨 소리에 맞춰 식당으로 달려가 식판을 들고 줄을 서고, 벨 소리가 들리면 자습을 하고, 취침 벨에 맞춰 소등을 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것.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의 계급이 곧 자식의 계급이다'라는 서글픈 인지를 스스로 하는 것.
그런 것들 보다 나를 졸업할 때까지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지독한 향수병도 생겼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던, 세상물정 모르는 엄마가 가엽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동생들이 불쌍해서 한 달에 한 번 허용된 외박을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다.
외박 날은 하룻밤을 가족들과 있고 싶어서 만 일을 제치고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경춘선과 중앙선을 갈아타며 긴 시간 기차를 탔다.
모든 걸 포기하고 취업한, 엄마 같은 언니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싱클레어처럼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 보려고 하는 것, 왜 그것은 그토록 어려울까?'하고 나 자신만을 위해 고민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래도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그리움을 가지게 하는 사람들은 있다.
H는 내가 뒷산에서 울 때 끝까지 내 옆에 있어주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먹이며 힘을 주신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같이 도서위원을 했던 K선배는 말없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책을 건네주었는데, 나는 주인공 '제제'에 이입되어 밤새 울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제1고등학교'
현재 나의 모교 이름은 사라졌다.
지금은 'ㅇㅇ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몇 년 전 C시에 갈 일이 있어서 일부러 나의 모교를 들렀다. 나의 자취가 선명하게 기억났지만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픔보다 덤덤함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교장인, 어릴 때 나처럼 아버지가 육군 상사이셨던 지인이 있다.
제1고등학교를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 계급 따라 차별이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날,
이제 최종학력에 제1고등학교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나는 무척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