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그날은...

by 모니카

그해는 윤달이 꼈었다.

추석이 늦게 찾아왔다.

그해 추석은 우리 가족에게 풍성함 대신에 찬 서리와 한기와 메마름과 상실을 안겨주었다.


막내까지 모두 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더 이상 온 가족을 끌고 터전을 옮기지 않으셨다.

대신 아버지 혼자 발령받은 부대로 떠나셨다.

나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갔고, 아버지는 근무 지방으로 가셨고, 집에는 엄마와 언니 동생들이 남았다.


온 가족이 모여 추석을 보내고 아버지와 나는 추석날 늦은 오후 부대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명절 후라 청량리 역은 더 붐볐다.

곧 출발하는 완행열차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개찰 한 시간 전부터 몇 겹의 줄이 질서 없이 엉켰다.

우리도 줄을 서야 하는데 아버지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아수라장이 된 개찰구 입구에서 사람들 줄을 세우고 계셨다.


"줄을 서요! 질서를 지켜요!"


그날

아버지는 그것이 아버지의 사명인 것처럼 줄 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개찰이 시작되면 우리도 죽어라 뛰어가서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도대체 저러실까?

나는 입이 댓 발이나 나왔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아버지 그만해, 우리도 줄 서야 되잖아.'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어려워서, 불만이나 짜증을 내 본 적이 없어서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이윽고 기차에 탔다.

아버지와 동행하면 항상 나란히 앉아 말없이 목적지까지 갔다.

'저거 먹고 싶니? 사줄까?'

물어보지도 않고 통로를 지나는 카트에서 가끔 브라보 콘이나 달걀과 사이다를 사 주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다른 집 아버지처럼 다정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말없이 먹을 걸 건네주는 아버지가 섭섭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가 달랐다.

쉴 새 없이 앞사람과 이야기를 했다.

아니 아버지 혼자 말했다.

주로 자식들 얘기였다.


'우리 큰 딸은 간호전문대 다니고, 우리 작은 딸은 이다음에 선생이 될 거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는데 엉뚱한 아버지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건 아버지의 바람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뭐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언니가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 못내 서운하셨는지, 언니는 마음에도 없는 간호전문대에 가기를 원하시긴 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정이 많은 분이라고는 느꼈지만 표현을 안 하시고, 다정하지도 않고, 살가운 말 한마디 하실 줄 모르는 아버지가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말이 많으셨다.


아버지가 먼저 대성리에서 내리셨다.

기차 안에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조심해서 가라'가 아버지 다운 작별인사였다.

작별인사 후 뒤도 안 돌아보시고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신경이 쓰여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밤이 되어 어두웠다.

기차에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 속에 뜻밖에도 아버지가 보였다.

벌써 역사를 나가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앉아있는 차창 밖 어둠 속에 서 계셨다.

기차가 출발하니 손을 흔드셨다.

너무 아버지 답지 않은 행동에 나는 당황해서 차창에 바짝 얼굴을 대고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곧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본, 살아계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 혼자 후회한 일이 있다. 입 밖으로 내놓으면 너무 안타까워 속으로만 가슴앓이했다.


'그날 아버지를 따라 같이 내렸다면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늦었으니 아버지랑 자고 내일 새벽에 간다고 떼라도 써 볼걸 그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은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한다던데.....



그날

아버지와 헤어져 창피한 줄도 모르고 괜히 훌쩍거리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 당번 종열이 아저씨와 언니가 가숙사로 나를 찾아왔다.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자습벨이 울려 기숙사는 조용했다.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는 수녀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내셨다.

4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수녀님이 계속 내 등을 쓰다듬으셨다.

나는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에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1층에 창백한 얼굴로 서있는 언니는 집에서 입는 옷과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종열이 아저씨와 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이끌었다.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을까 두려워서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확신했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저씨와 언니가 나를 데리고 대성리에서 내렸다.

놀라 쳐다보는 나에게 종열이 아저씨가 말했다.


'선임하사님이 돌아가셨어."


나는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 당시 세태로 부대는 비상태세였다.

추석을 보내고 온 아버지도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45세 셨다.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크고 든든한 우산이 접히자 남겨진 아내와 2녀 3남은 비바람 몰아 치는 벌판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막내는 초등 2학년, 둘째는 5학년, 장남은 중2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수학여행 중이었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막내 이모부와 뒷수습으로 정신이 없었다.

뻥 뚫린 가슴을 안고 나는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내 생각만 하고 가족들 옆으로 전학을 가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꿈속 같은 현실이지만 세월은 흘러갔다.

아버지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는 날까지 시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렀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미망인 연금을 남기고, 자식들에게는 보훈대상자라는 타이틀을 남겨 주셨다.

엄마의 마지막 요양병원비까지 해결하시고 자식들의 학비를 끝까지 책임져 주셨다.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점점 약해지는 힘으로는, 능력으로는 엄마와 자식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그 방법밖에 없어서, 엄마의 남은 인생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일찍 가신 걸까?


사십 대의 젊은, 군복 입은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있는

아버지가 그립다.

멋진 양복 차림의, 점잖은 한복 차림의 아버지는 더 보고 싶다.


정말 진하게 효도를 하고 싶은데...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