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갔지만 잊히지 않는 곳
나의 보호자 언니
박씨네에서는 2년 정도 살았다.
그전에는 아버지 근무 부대가 바뀌면 이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부대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집을 옮겼다.
일곱 식구가 살기에 방 두 칸은 비좁았다.
이사 가는 집이 같은 마을의 큰길 건너에 있어서 전학을 갈 필요는 없었다.
새로운 학교와 선생님, 새 친구들이 항상 나를 들뜨게 했는데 전학을 가지 않아서 좀 섭섭했다.
한 번 이사를 할 때마다 겪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 번거로움, 필요한 손길 같은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눈치채지 못할 나이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복잡한 일들은 다 언니의 몫이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언니 자신이 스스로 그걸 짊어지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언니는 같이 크는 형제자매라기보다는 항상 동생들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어려서부터 눈만 뜨면 맏이의 역할과 의무가 주입되어 온 터라 언니도 모르게 양보와 참을성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나와 싸울 때도 그랬다. 흔한 자매들 싸움처럼 서로 맞붙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주로 나만 목청을 높였다. 언니는 보통 대꾸를 안 했다. 언니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 나는 약이 올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한 번은 계속 치근덕 거리며 덤비는 나를 세차게 떠밀었다.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 손을 짚는 바람에 엄지 손가락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통증도 심했다. 언니만 야단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언니는 뼈를 잘 맞춘다는 길 건너 구멍가게 아저씨한테 나를 데리고 갔다. 아저씨는 내 손가락을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너무 신기해서 언니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싸우면서 컸지만 한 번도 언니가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 두 살 터울이지만 언니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 학년은 세 학년이 차이가 났다. 하지만 차이가 얼마나 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니의 인식에는 나도 그저 보호해야 할, 챙겨줘야 할 동생 중에 하나였나 보다.
중학생이 막 된 어느 날 나는 학교 갔다 와서 눈이 붓도록 울었다. 선생님이 차별을 한다는 이유였다. 초등학교 때의 정보가 전해져 중학교에서도 당연히 선생님의 눈길을 끌 줄 알았던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 한 번 안 주시고 부잣집 딸이라고 소문난 아이 이름만 불러 주셨다,
저녁도 먹지 않고 우는 나를 엄마가 달랬다.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언니는 다음날 우리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우리 선생님은 언니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언니의 담임선생님이기도 했지만, 언니는 이미 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언니는 당연한 듯 선생님께 말씀드렸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언니가 우리 선생님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다음날 선생님은 정말 내 이름을 상냥하게 불러주셨다.
물론 때 마침 찾아온 사춘기에 나 혼자만 간직하는 고민도 쌓이고 실망과 서운함과 이유 없는 슬픔으로 밤새 눈물짓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중학 시절의 사진 속 나는 항상 웃고 자신감 있는 얼굴로 남아있다.
나에게는 묵묵히 뒷받침해 주신 아버지와 이유를 묻지 않고 내 편이 되어준 엄마와 마땅히 같이 받아야 할 사랑도 나눠준 언니가 있기 때문이었다.
스물몇 살 때인가,
높은 열로 열꽃이 옴 몸에 퍼져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걱정만 가득한 엄마 보다도 묵묵히 기도해 주는 언니가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 언니가 병실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랑도 나누어 줘 본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나도 언니를 사랑하고 동생들도 사랑하지만 어려운 일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언니처럼 인내와 포용을 베풀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언니가 네 명의 동생들을 위해 흘린 눈물을 나는 헤아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뇌출혈로 쓰러졌어도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부른 이름이 자식들이 아니라 동생들 이름이었으니...
요한 사진관과 스위스 시계방
이사 간 집은 꽤 컸다.
이번엔 기역자 기와집 안채가 우리가 살 집이었다.
큰 부엌과 안방, 넓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넛방이 있었는데 안방을 장롱으로 가로막아 방 두 개로 만들어서 방이 세 개가 되었다. 넓은 안방은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세 남동생들 방이 되었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짐이 있는 건넛방을 쓰기도 하고 장롱으로 막아 생긴 윗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이름 모를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화단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하얀 꽃이 피던 매화나무도 있었다. 그 하얀 꽃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울적하게 하기도 했다.
마당 왼쪽에 펌프와 수도가 있는 넓은 콘크리트 수돗가에서 나는 하루에 두 번씩 허벅지까지 열심히 씻었다. 나는 이제 외모에 무척 신경 쓰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 어린이 티가 물씬 나는데 한껏 멋을 부리고 수돗가에 있는 나무를 살짝 잡고 찍은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난다.
마당 건너 도로에 인접한 일 자 집에는 이 집 주인이 운영하는 '스위스 시계방'과, 역시 세 든 '요한 사진관'이 나란히 있었다. 두 집 다 첫 딸이 네다섯 살 된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우리 부모님들과 나이 차이가 나서 그랬는지 원래 품성이 그런지 안채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자주 젊은 주인집 부부가 돈 밖에 모른다고 눈을 흘겼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내가 모르는 어떤 갈등이 있었을 거라는 상상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예를들어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등의 돈 문제는...
그래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요한 사진관과 스위스 시계방, 두 집 딸들 현주, 현아, 그리고 두 부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산 세월이 내 삶에 영향을 꽤 준 것 같다. 나는 이런 별스런 문제로 고민을 하기도 했으니까.
요한 사진관 안주인 현주 엄마는 늘씬한 외모를 잘 가꾸고 옷도 항상 폼나게 입었으나 스위스 시계방 안주인 현아 엄마는 피부도 하얗고 예쁜데 립스틱 한 번 바른 적이 없고 옷도 아무거나 막 입고 다녔다.
나는 오고 가는 그녀들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미의 기준은 뭘까? 어떤 사람이 더 당당하고 매력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는
언니도 고등학생다운 고민으로 힘이 들어서 동생의 풋풋한 가슴앓이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내 속에서 휘몰아치던 폭풍우를 이상하게 언니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즈음에는 아버지와 엄마에게 생기는 불만과 반감으로 힘들어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몸치장에 시간과 돈을 쓰며, 오직 식구들을 해 먹이고 입히는 일에만 신경 쓴다고 생각했다. 딸의 감정의 변화 따위는 관심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학교 갔다 오면 엄마는 우리 집에서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며 놀고 있는 적이 많았다. 나는 엄마가 고민도 없고 생각도 없는 한심한 사람으로 보여 책가방을 내던지며 짜증을 부리고 화를 냈다.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돌아가셨으니 이제 물어 볼 수도 없다.
엄마도 참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도 식구들을 위해 온갖 희생을 하시는 건 고맙지만 왜 그렇게 무뚝뚝하고 유머도 없고 무섭게만 구는지 야무지게 따지지 못하는 것이 속상했다. 아버지와 친구처럼 친한 친구가 한없이 부럽고, 그렇지 못한 나는 불행하다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훗날 엄마도 요한 사진관, 스위스 시계방 집에 살 때를 기분 좋게 이야기 하시는 걸 보면 그때가 가장 풍요롭고 행복해하시던 때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아버지도 전성시대라고 기억될 만큼 패기 넘치셨고 집안의 많은 대소사를 적극적으로 치르셨다.
외할머니 환갑잔치를 우리 집에서 열어 드리고, 막내 이모는 우리집에서 서울 총각과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긴 돼지 곱창에 고기와 찹쌀과 각종 야채를 버무린 속을 꾹꾹 집어넣고 쪄주신 순대 맛은 잊을 수가 없고, 수줍어 고개도 못 드는 이모를 쿡쿡 웃으며 훔쳐보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해 진다.
외할머니와 막내 이모 두 분은 아픈 엄마 대신 오랫동안 우리 집에 오셔서 집안일을 해 주셨으니 아버지는 그 보답을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