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깨달음
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집이 가까운 사람은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 집도 학교 근처에 있었다.
집에 오면 엄마가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는 내가 밥을 뜨면 "더 많이 떠." 하시고 반찬을 올려주셨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숟가락을 입에 넣는 걸 지켜보시며 '꼭꼭 씹어." 하셨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밥과 나만 쳐다보셨다.
"아유 잘 먹는다. 많이 먹고 건강해야 해."
말은 안 하셨지만 소리가 들렸다.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
엄마 속 마음이 다 보였다.
행복했다.
공부는 쉬웠다. 교과서만 외우면 100점 맞았다.
한 번 1등을 하면 1등을 안 뺏기려고 더 열심히 했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면 다른 것도 다 잘한다고 생각했다.
군 내 글짓기 대회, 그리기 대회, 공작 대회, 심지어 주산 대회까지 내보냈다.
나가면 하다못해 3등 상이라도 받아왔다.
어느 신문사 주최 '내 고장의 명소'라는 제목의 글짓기 대회에서는 전국 장원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운동장 조회 때마다 상 타러 나가는 것도 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고 선생님들은 애쓰지 않아도 칭찬해 줬다.
어린 나의 세상은 어려운 일도 없고 슬픈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중학생이 되었다.
굳건했던 내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자꾸 생겼다.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초등학교 때 어떤 아이였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나는 부잣집 자식이 아니었다.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대놓고 포목집 딸 미숙이를 예뻐하셨다. 미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지만 무엇보다 집이 부자였다. 공부는 노력으로 되지만 예쁜 것과 부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14살이 된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로 우울해졌다.
새로 오신 영어 선생님은 친구와 내가 한 숙제가 똑같다고 우리 둘을 불렀다. 보여 준 사람이나 베껴 쓴 사람이나 다 잘못한 것이라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셨다. 우리 둘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이나 훈계를 들었다. 나는 내가 베껴 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해서 억울한 것보다 교무실에서 공개적으로 야단을 맞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워 눈물 콧물 뚝뚝 흘리며 울었다.
뭔가 뒤죽박죽 엉켜버린 게 머릿 속인지 가슴 속인지 알 수 없었다.
학교는 멀었다. 신작로를 한참이나 걸어가야 했다. 등하교 길에 같이 걷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면 괜히 눈물이 났다. 자꾸 초라해지는 네 마음을 나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같았다.
사춘기는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 주질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엄마가 말했다.
"중대장이 이사 왔는데 큰 딸이 너랑 동갑이랜다."
웬만한 일엔 기죽을 엄마가 아닌데 말에 기운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성숙이랑 친하게 지내길 바랐다. 물어보진 않지만 성숙이네 집에 갔다 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가끔 떡이나 김치 같은 것을 들려 보내기도 하고 성숙이 엄마가 뭐라 했는지 무척 궁금해하셨다.
성숙이는 우리 반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몇 집 건너 살아서 나는 자주 놀러 갔다.
살결은 좀 가무잡잡하지만 내 눈에 예뻐 보였다. 말도 조용조용히 하고 마음씨도 고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잘 웃어 주었다. 문제는 나였다. 성숙이와 얘기를 나눌 때면 자꾸 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성숙이 눈치를 보게 되었다. 특히 표독스러운 성숙이 동생 금숙이가 쏘아붙이면 기가 죽어 나오던 말도 기어들어갔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와 같이 숙제를 할 때면 당연한 듯이 가르쳐 주곤 했는데 성숙이랑 공부할 때는 왠지 내가 틀릴 것 같아 자신이 없어졌다.
나를 더욱 기죽게 하는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우리 오 남매나 우리 집에 드나드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말할 때 항상 분명하고 엄격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중대장님 이야기를 할 때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말소리도 작아지는 것 같았다.
성숙이네 갔을 때 언뜻 본 성숙이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보다 젊어 보였다. 더 젊은 성숙이 아버지가 더 나이 든 나의 아버지에게 명령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산 같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도 작아지게 만들었다.
먼 옛날 수해가 나서 부대로 피신 갈 때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장대 같은 비가 퍼붓는 진흙탕 골목에서 아버지는 한 사병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중대장 그 새끼가 뭔데,.....' 이 말이 똑똑히 들렸다.
이제야 그때의 상황에 대해 갖가지 상상을 해본다.
우리가 부대로 피신 가는 걸 중대장이 반대했나? 그걸 전하는 사병의 멱살을 잡고 중대장한테는 할 수 없는 화풀이를 하셨나?...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법인가 보다.
잊었더라도 내 부모님이 새겨주신 기억이라 언제라도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장교와 하사관,
아버지들의 계급이 자식들의 계급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상처는 군인자녀를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더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