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군인 아저씨들과 군부대, 커다란 군용 트럭, 국방색으로 시작된다.
나의 첫 선생님은 탄일종을 알려준 교회 주일학교 군인 선생님이셨고, 언니의 첫 과외 선생님도 군인 아저씨였다.
지금이야 거리에서 마주치는 군인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아기 같아도 소위 군인가족이었던 내 어린 시절의 군인들은 여전히 용감하고 늠름하고 다정하기까지 한 국군장병 아저씨로 남아있다.
그 시절의 군인가족이란 아버지 직업이 군인인 것 그 이상이었다. 군인 아저씨들은 삼촌들처럼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몇몇 아저씨들은 지금도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친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오버랩되는 색이 있으니 바로 국방색이다.
국방색은 내가 빨강 파랑 노랑 색깔과 같이 알게 된 색이다.
하지만 나에게 국방색은 색의 한 종류가 아니라, 43세에 돌아가셔서 영원한 푸른 제복의 육군 상사로 남아있는 나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 내 주변에 늘 있어 준 군인 아저씨들과 군용 트럭과 부대의 상징이다.
國防色이라는 한자를 모르는 어린 시절에도 국방색은 나라를 지키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부대에서
아버지의 보직은 늘 인사계님 아니면 선임하사님이었다.
인사계님이라고 불릴 때는 군인아저씨들이 유독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부엌에서 누나처럼 아저씨들 하소연을 들어주고 위로도 했다. 엄마의 입김이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몇몇 아저씨들은 휴가를 가게 되었고 언니와 나는 아주 기뻐했다. 한 일주일 후 휴가 갔다 복귀한 아저씨들 손에는 종합선물과 소년중앙, 소년세계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사병들에게나 우리 오 남매에게는 엄하고 무섭게 대했다. 우리 오 남매는 누가 잘못을 했던 단체벌을 받았는데 맏이인 언니가 가장 많은 잔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설명할 때는 그냥 '군대식'이라고 하면 다 통했다.
하지만 엄마한테는 달랐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봐도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셨던 기억은 없다.
말다툼을 하시는 것 같아도 들어보면 엄마만 계속 쏴 붙이고 아버지는 그냥 허허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무엇이든 양보하셨던 것 같다. 양보를 넘어 외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엄마를 온실 속 화초처럼 대했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헌신적이면서도 자식들이 날마다 단체벌을 받는 것은 즐기시나 할 정도로 퇴근하신 아버지를 붙들고 하루의 우리 행적을 일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비계가 듬뿍 든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식사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엄마가 소곤소곤할 때면 우리는 긴장했다.
엄마 말을 들으신 다음 아버지는 우리 오 남매를 집합시켰다. 아버지를 화나게 하는 우리의 죄목은 엄마 말을 안 들은 것, 형제끼리 싸웠거나 별명을 부르며 서로 놀린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주로 엄마 말 안 들은 것이 큰 죄였고, 남동생들은 별명을 부르며 싸운 죄였다. 첫째 동생은 행동이 굼떠 영감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둘째 동생은 가무잡잡해서 깜씨, 막내 동생은 이유는 모르지만 쨈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우리 집에서는 허용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우리가 별명을 부르는 것이 자식의 큰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만감해 하셨다.
어릴 때 우리 집엔
몸이 약한 엄마를 위해 집안일을 하는(돕는 것이 아닌) 외할머니나 이모들이 항상 같이 사셨다.
그래서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같이 사는 것이 당연하고 흔한 일인 줄 알았다. 한 번 오시면 몇 해를 넘기는 것은 보통인데 막내 이모는 가끔 혼자서 훌쩍거리기도 했다. 집안일을 해주는 것에 대한 보답인지 아버지는 외할머니 환갑잔치를 우리 집에서 제법 성대하게 치러드리고, 막내이모 시집보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를 끔찍이 아끼셨고, 그런 사랑을 받는 엄마는 아버지가 전부였을 것이다.
사랑이 커서 시샘을 받았을까?
엄마는 남편 복이 있는 걸까, 아니면 없는 걸까?
40 초반에 남편을 잃은, 온실 속 화초 같던 엄마는 91세가 되도록 젊은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리워하며 사셨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50년 전 먼저 잠들어있는 아버지 옆에 나란히 합장되셨다.
내 어린 시절은
영원한 육군 상사 젊은 아버지, 군인의 아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사병들을 챙겨주시던 엄마, 삼촌 같고 큰 오빠 같았던 군인 아저씨들이 점철되어 하나의 풍경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