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여사의 낙

엄마, 미안해

by 모니카

막내 동생과 시간을 맞춰 엄마한테 갔다.


담이 없어서 앞에 주차하는 소리가 크게 들릴 텐데 집안이 조용했다. 현관문을 당겨 보니 역시 잠겨 있다. 오는 길에 곧 도착할 거라고 전화를 드려서 어딜 가시진 않았을 텐데 기척이 없다.

문을 흔들며 '엄마, 엄마' 큰 소리로 부르니 그제야 안에서 '누구야?'하고 나오셨다.

꼬불꼬불한 짧은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하고, 눈썹을 진하고 그리고, 입술은 빨갛게 화장을 한 엄마가 희미하게 웃음을 띠며 문을 열었다.


매달 뵙는 엄마는 조금씩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막내까지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난 후 엄마 혼자 사신 세월이 꽤 길었다.

집도 새로 짓고, 달마다 나오는 미망인 연금으로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런 안정감이 조금씩 엄마를 변화하게 했다.

돈의 위력 같았다.

엄마가 받으시는 연금의 액수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부터 그건 엄마를 위한 아버지의 유산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형제들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었다.

엄마도 '연금은 니 아버지다.'라고 하셔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사시는 것 만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최대 관심은 연금 타는 날짜이며, 가장 든든한 무기는 현금이었다.

커다란 달력에 표시를 해 놓으시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달 우체국에 직접 가서 타오셨다. 전화를 걸면 연금 타는 날짜를 계속 확인하셔서 대화가 어려웠다. 연금을 손에 넣은 후의 만족감과, 다음 달 또 받는다는 설렘이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 것 같았다.


엄마 장롱 맨 아래 서랍 옷 사이에는 만 원짜리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는데, 혹시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예금을 하자는 설득도 통하지 않으셨다.

돈 이야기를 꺼내면 표정이 굳어져서 고개를 돌리셨다.

수북한 새파란 현금을 돈으로 보면 눈이 커질 일이지만, 그것이 엄마의 위안이고 자존심이 된다고 생각하면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엄마가 치매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뻔히 누가 왔는지 아시면서도 '누구야?' 하고 엄마는 습관처럼 물으셨다.


"누구긴요~ 엄마 막내지~ "

"우리 막내 왔어~"

"안여사님 더 예뻐지셨네, 사랑해요~"

"나도 우리 막내 사랑해."

엄마는 안여사라고 부르면 좋아하셨는데, 막냇동생은 딸인 나보다 더 살갑게 엄마 기분을 맞춰 드렸다.


"엄만 막내만 눈에 보이나 봐."

"너도 참, 말을 그 따위로 하니?

멋없는 내 말에 엄마가 눈을 흘기며 서운해하셨다.

마음의 고향 같은 엄마를 상상하며 나도 엄마를 꼭 껴안았다.


집 안에 들어서니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왜 이렇게 문을 꼭꼭 닫고 있어 엄마, 환기 좀 해, 건강에 해로워~"


짜증을 내며 방마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냥 엄마 좋아하시는 말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못되게 굴까 금세 뉘우쳤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면 한참 후에 엄마는 돈을 내미실 거다.

잔소리하거나 대화 중 불리해지면 슬그머니 돈을 주시는 엄마가 싫고, 결국 그 돈을 받는 내가 더 한심했다.

나는 바다 같은 엄마, 무조건적인 사랑, 그냥 안기고 싶은 엄마 품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엄마가 나갈 채비를 하셨다.

"가자."

엄마는 머리를 가다듬고, 화장을 다시 고치고 앞장을 서셨다.

언제부턴가 엄마한테 오면 반드시 하는 일이 있었다. 마트에 가는 일이었다.


시골에도 대형 마트가 여기저기 생겼다.

오일장도 서지만, 그 규모는 점점 작아지고, 시골 사람들도 한 장소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장을 봤다.

차를 주차하고 입구에 늘어선 카트를 하나 끌어냈다.


"두 개."

"두 개나?"


안여사가 손가락을 브이자로 만들며 앞장서서 들어갔다.

막내와 나는 카트를 하나씩 끌고 뒤따라 갔다.

입구에 있는 계산대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반기고,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할머니 오셨어?"

"어휴, 더 젊어지셨네."

"오늘은 뭐 사러 오셨어. "


그 와중에 내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있다.

"돈만 많은 할머니 오셨네. "

여자 둘이 물건을 정리하며 소곤거렸다.


직원들이 아는 체해도 엄마는 대답도 안 하고 천천히 마트 안을 돌았다.


"이거 두 개 넣어, 저것도,..."


아무 말 없이 카트를 끌고 뒤따라 가며 엄마가 지적한 물건들을 넣었다.

금세 카트 두 개가 가득 찼다.

주로 쌀, 화장지, 티슈, 세제, 간장... 이런 생활용품이었다.


"얼마야?"

계산원에게 엄마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뒤돌아 손지갑에서 꼭꼭 접은 만 원짜리를 꺼내서 세었다.

스무 장이 넘는 만원 짜리를 계산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잘 세 봐."

"네, 맞아요 할머니~"

계산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루즈 할머니한테 잘 맞는 거 들어왔어요."

계산대 옆 화장품 코너에서 엄마를 불렀다.

"응, 우리 아들 딸들이 왔어. 담에 올게."

엄마는 뒤로 손을 흔들며 뿌듯한 표정으로 마트를 나왔다.

엄마 화장대에 가득 놓인 고가의 화장품들이 떠올랐다.


엄마가 사 준 생활용품을 차 트렁크에 실으며 겨우 한 마디 했다.

"엄마 잘 쓸게."


자식들에게 생활용품을 펑펑 사줄 수 있는 풍족한 엄마를 둔 게 왜 기쁘지만은 않을까?



동생이 내일 일이 있어 밤에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드는 엄마를 남겨두고 그날 밤 떠났다.


이게 아닌데...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다.

나는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고, 엄마 품에 안겨보고,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그런 당연한 일이 왜 이렇게 어렵게 됐을까?


나는 그것을 엄마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식이 어떻게 살던지 관심이 없고, 그놈의 연금만 꼭 품고 사신다고 원망했다.

나야말로 돈 뒤에 숨어있는 엄마 속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엄마를 너무나 외롭게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긴 세월 혼자 사신 엄마를 꼭 껴안고 다독다독 해 드리고 싶은데 엄마가 안 계신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