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취를 품은 집
조활 할아버지 댁은 아버지와 같이 우리 일곱 식구가 살았던 마지막 집이었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옛날 기와집이었는데, 80대의 주인 노부부가 건넛방 하나를 쓰시고 우리 가족은 나머지를 내 집처럼 다 사용했다.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엄마와 아버지는 여러 집을 거친 후, 방 세 칸을 쓸 수 있는 이 집을 구하셨을 것이다.
좀 낡긴 했지만 한적하고 시골집다운 낭만이 있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싸리울타리에 이른 아침이면 나팔꽃이 활짝 피었다. 동녘 햇살이 퍼지기 전 영롱한 이슬이 맺힌 나팔꽃을 바라보며 양치를 할 때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져 콧노래가 나왔다. 그때부터 나팔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 되었다.
뚜껑이 덮여있는 마른 우물이 아직 남아있고, 그 옆 장독대 돌 단 사이로 키 큰 맨드라미가 자랐는데, 닭벼슬 같이 생긴 검붉은 꽃을 만지면 깨알보다 작은 검은 씨를 쏟아냈다. 화단에 가득한 분꽃과 앞 줄에 바짝 엎드린 채송화는 가만히 두어도 제 자리를 넓혀갔다.
집을 돌아 뒷문으로 나가면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나는 등하교할 때 큰길을 놔두고 지름길인 논 길을 걸어 다녔다. 등굣길은 이슬이 종아리를 적셔서 싫었지만, 하굣길은 계절 따라 변해가는 벼를 손으로 스치며, 멀리 지는 해와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가을이면 내 발걸음에 놀란 메뚜기가 후두둑 튀어나와 논 가운데로 달아나는 것을 보는 것도 기분을 좋게 했다.
집 앞 큰 공터에는 엄청나게 많은 통나무가 쌓여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 통나무 껍질을 벗겨 팔았다.
아버지가 막 돌아가신 후 언니는 집안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 통나무 껍질을 온종일 벗겼다고 했다.
통나무 더미 뒤로는 기찻길이 지나갔다.
우리는 잠결에도 지나가는 기차 소리로 아침 6시라는 것을 알았다.
언니는 집 앞을 지나는 그 기차를 타고 한 정거장 지나서 있는 고등학교로 통학을 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버지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언니도 서운했겠지만, 부쩍부쩍 자라는 자식들을 보고 아버지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
겨우 40을 넘기고 4년이 지난 새파란 나이지만, 아버지는 점점 저물어 가고 계셨다.
기찻길 건너에는 작은 산이 혼자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그 산을 에미산이라고 불렀다.
아기를 잃은 엄마의 슬픈 전설이 있는 산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마루에 서면 흩어지는 안갯속에서 불쑥 다가오는 그 산이 서글픔보다는 상쾌함으로 먼저 찾아왔다.
아직 슬픔도 고민도 진짜 맛보지 못해서 그랬나 보다.
아버지는 뒤란에 있는 헛간을 수리해 탁구장을 만들어 주셨다.
전에 닭들이 살았는지 소가 살았는지 모르지만 지저분한 그곳을 청소하고 탁구대를 들여놓으셨다.
언니와 나는 살이 찌면 안 된다고, 동생들은 운동신경이 발달되어야 한다고 우리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탁구대를 들여놓으셨다.
'사랑한다'는 말은 꿈에서도 못 들을 것이고,
'요즘 힘든 건 없니?' 하는 살가운 말 한마디 없는 분이 언니가 중학생이 되자 스피드 스케이트를 사 주시더니, 이제는 탁구장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동네 아이들 모두 앉은뱅이 썰매를 타는 논 썰매장에서, 언니 발에 맞춰 산 스케이트를 끈을 바싹 조여매고 번갈아 탔다.
헛간 탁구장에서 똑딱 거리며 탁구를 친 덕분에 우리 오 남매는 탁구를 다 잘 쳤다.
아버지의 무뚝뚝함과 굳은 표정 속에는 늘 자식을 향한 사랑을 꼭꼭 품고 계셨을 텐데
가시고 난 뒤,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돌아가실 때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먹고 나니,
주름진 손을 잡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그리움이 더 커진다.
성함이 무척 인상적인 조활 할이버지는 키가 크고 조용한 분이셨다. 치아가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자주 따뜻한 양지에 앉아 반으로 자른 참외를 수저로 긁어드셨다. 반면에 아내 되시는 분은 마르고 예민하고 좀 차가웠다.
노부부와 우리 가족 간에 큰 마찰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인 할머니를 마주치면 불편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전세 계약 기간이 만료 됐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집을 빼달라는 요구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이 연로한 노부부에게 끼친 심적 영향도 컸을 테니까.
조활씨 댁을 떠남으로써
아버지 혼을 부르는 예식을 치렀던 그 마당과도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다.
조활 할아버지 집터는 지금은 개발이 되어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그대로 보존돼 있더라도 찾아 가 보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