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수산시장에 들러 제대로 삭힌 홍어를 사들고 내려가면, 엄마는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해물탕을 끓이고 계셨다. 꽃게는 기본이고 문어, 전복, 새우, 조개, 미더덕 등 해물탕 맛의 주인공들이 총출동했다. 가스레인지 불판이 모자랄 정도로 큰 전골냄비 속에 통째로 누워있는 벌건 꽃게와 굵은 문어다리를 이고 끓고 있는 해물탕은 소리만 들어도 침이 고였다. 엄마가 '됐다' 하면, 두 사위가 기다리고 있는 둥근 밥상으로 냄비가 이동됐다. 무럭무럭 올라오는 김에서도 매운맛이 났다. 국물 한 수저를 떠 마시면 입에 짝 붙는 감칠맛과 함께 매운맛이 질세라 입 안을 공격했다. 언니가 게딱지를 떼어내고 문어다리와 전복까지 가위로 뚝뚝 잘라 나눠주면 형부는 '장모님, 넘버원'을 연발하며 엄지 척을 했다. 멋없는 작은 사위도 고개 들 사이가 없다. 금방 게 딱지와 새우 껍질이 수북이 쌓이고 전골냄비는 바닥을 드러냈다.
막 담근 겉절이 또한 하얀 쌀밥 한 그릇을 금방 동나게 했다. 새빨갛게 배추를 포박한 고춧가루 양념색깔에 먼저 침을 한 번 꼴깍 넘기고, 절대 칼로 썰지 말아야 한다는 엄마의 명령대로 손으로 쭉쭉 찢은 김치를 밥 위에 올려 입에 넣는 동시에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금방 송송 배어 나온 이마의 땀을 닦으며 혀를 내밀고 손부채를 흔들어 대며 미리 떠다 놓은 냉수를 들이켜기 바빴다.
엄마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모으고 정신없이 먹는 두 딸 내외를 바라보셨다.
장모님의 중독성 있는 강렬한 매운맛은 두 사위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엄마, 안여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삭힌 홍어와 청양고추였다. 미나리와 청양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충분한 식초와 약간의 설탕에 버무린 홍어무침과 막걸리만 있으면 해물탕에 대한 충분한 보답이 되었다.
엄마가 한창 부러울 것 없이 씩씩하게 사시던 때였다.
언제부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정해진 대화 패턴이 생겼다.
"엄마, 오늘 별일 없었어요?"
"응, 음식해 주고 막 들어왔어."
"아니, 이렇게 늦게?"
"응, 거기서 집까지 태워다 줬어."
"아니, 음식 한 집이 어딘데?"
"응, 쩌그 잔치집이야."
"허리 아프다면서... 안 가면 안 돼?"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
"...."
엄마가 돈이 아쉬운 건 아니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미망인 연금은 적지 않았고, 그 돈은 오롯이 엄마 혼자 몫이었다. 그래도 건강만 허락한다면 움직이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시간이 낮이던 저녁이던, 심지어 아침 시간에도 음식을 해 주고 지금 막 들어오셨다고 했다.
뭔가 이상해서 엄마의 '사랑하는 막내'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막내는 엄마가 음식을 해주러 다니시는 건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주로 상갓집이나 근방의 ㅇㅇ산 관광지 식당에서 엄마 음식의 강렬한 매운맛을 찾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엄마를 통한 정보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반만 믿고 반은 부풀린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 혼자 지내신 세월이 길어질수록 눈에 띄는 일들이 생겼다.
그중 하나는 물건들을 사서 쟁여놓는 것이었다.
안 쓰는 작은방에는 간장, 설탕, 식용유, 밀가루, 세제, 헹굼제 등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여있고, 냉장고에는 간 생강과 마늘, 새우젓, 단무지, 두부, 시판 된장 같은 것들 때문에 공간이 없고, 냉동실에는 떡과 아이스크림이 꽉 차 있었다.
언니와 나는 갈 때마다 '그냥 놔둬~'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그것들 유통기한 확인하기 바빴다. 혼자 계시며 '돈 쓰는 재미로 사시니 이해해야지' 하고 포기했다.
엄마의 남다른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낮에도 현관문은 물론 창문까지 꼭꼭 잠그고 계셨다. 혼자 있기 심심할 텐데 노인정에라도 가시라 하면 '엊그제 떡과 술 보내서 안 가도 된다'라고 질색을 하셨다. 필요한 걸 보내는 것으로 동네 노인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엄마만의 노력일 것이다.
아들들과 고스톱 칠 때도 기분이 좋아 웃음소리가 커지고, 한 잔 하시면 시키지 않아도 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흥이 많은 분이신데, 의외로 근처의 몇몇 분들과만 왕래를 하셨다. 동네 어른들과의 여행도 멀미를 핑계로 피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런 모습을 보이신 건 다 가족들과 있을 때였다. 아마 남들 앞에서 실수하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러실 것이다.
'엄만 테레비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며 하루 대부분을 리모컨을 들고 TV 앞 소파에 앉아 계셨다. TV를 켜 놓고 소파에서 주무시는 경우도 많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늘 TV소리가 들렸다.
드라마를 보실 때면 '저런 못된 년' '저런 죽일 놈' 하며 화면에 푹 빠지셨다. 대화 상대가 없어서 그러시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 몰입해서 잡념이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모습들은 한 달, 아니 몇 달 만에 한 번씩 뵙는 자식들에게 극히 일부분일 것이었다.
당일치기로 뵙고 오는 것이 다반사고, 아버지 기일이나 엄마 생신, 명절 때에만, 길어야 하루 이틀 자고 오는데 얼마나 엄마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있을까?
그것도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꽃이 피기 전에, 엄마는 몇 잔 술에 취하셔서 잔소리나 듣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엄마의 이런 모든 점은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엄마는 자식들에게조차 감춘 한 가지 비밀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셨다.
그것은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 세대엔 흔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세 자매 중 유독 둘째 딸인 엄마만 그러셨다. 외할머니나 엄마나 엄마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리시는 걸 보면 무슨 사연이 있었나 추측할 뿐이다.
문제는 엄마가 그것을 절대 들키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넌지시 한글공부책을 몇 번 꺼내 봤지만 당황하며 기분 상해하는 엄마 얼굴을 보고는 섣불리 시도를 못했다. 엄마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어쩌면 서로 눈치를 보다 엄마는 털어놓을 기회를, 자식들은 가르쳐 드릴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교회나 노인정을 질색을 하시며 동네 사람들과 거리 두시는 것, 만원 짜리를 선호하시는 것(색깔이 비슷한 오천 원과 오만 원짜리는 꺼리셨다), 필요 이상 물건을 사 들이시는 것, 자식들과도 깊게 대화하길 꺼리시는 것, 언뜻 스치는 슬픈 표정...
어쩌면 엄마의 모든 일상들은 글을 읽을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한없이 위축되었는지도 모른다.
딸 한테도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작아졌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엄마, 하나도 몰라? 아니면 알긴 아는데 읽기가 힘든 거야? 염려 마, 내가 가르쳐 줄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물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엄마 반응이 어떻게 나오든지 진작에, 억지로라도, 엄마가 한참 기운차게 사실 때, 정신이 흩트러지기 전에, 붙들고 가르쳐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엄마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못했다는 것은 엄마만큼 절실하지 않았고, 그만큼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핑계에 불과했다.
삶의 질을 더 좋게 도와드릴 수 있었는데 엄마는 기다려 주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