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안여사

by 모니카


근처에 관광지가 있어서 서너 개의 큰 마트와 분위기 좋은 카페까지 갖춘 시골 동네에서, 아담하게 집을 짓고 엄마는 꽤 오래 사셨다.

손을 꼽아보니 혼자 사신 30년 세월을 합해서 6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사신 것 같다.

엄마한테는 고향과도 같으셨을 것이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도 어느 자식집 하나 찾아오지 않으셨다.

아무도 없는 집이 걱정이 된다고 하시며, 멀미를 핑계로 대 집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가 달 넘게 집을 비워두고 계셨다.

병원에 입원을 하신 것이다.

거실문 턱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팔목이 부러지셨다.

검사 도중 알게 된 것이 충격적이었다.

백내장이 너무 심해 거의 앞이 안 보이실 거라는 것이다.

그동안 눈동자가 탁해 보여 여러 번 안과에 모시고 가려했지만, '이렇게 잘 보이는데 무슨 병원이냐?' 며 역정을 내시는 바람에 시도를 못 했다. 젊으셨을 때는 병원엘 너무 자주 가셔서 늘 약한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2년에 한 번 하는 건강검진도 마다하셨다.

심지어 아는 분의 집에 가셨다가 통에 담아놓은 틀니를 보시고는 징그럽다고 틀니도 완강하게 거부하셨다.

몇 개 남은 이로도 없어서 못 먹는다며, 갈 때마다 갈비와 홍어를 해오라고 하셨다.

가끔 진통제를 드시는 것 외에는 80이 넘도록 챙겨드시는 약도 없었다.

그 연세에 검사하면 문제 있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닐 텐데, 이번 낙상으로 손목뼈와 갈비뼈 몇 개 부러지고 폐가 안 좋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급하게 치료를 요하는 곳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백내장은 입원하신 종합병원에서도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심했다. 그대로 두면 실명하실 거라면서도, 연세를 감안해 무리하게 수술하지 말라고 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말에 인터넷을 뒤져 백내장 수술에 권위 있다는 의사를 찾아 K대학병원에서 어렵게 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전까지도 무서워서 받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수술 후 첫마디가 앞에 고속도로가 확 뚫린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늘 그래왔듯이 모든 병원비는 엄마가 지불하셨다.

엄마는 당신한테 들어가는 모든 경비는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셨다.

이번 사고로 올라오실 때도 통장과 도장을 먼저 챙기셨다.

손수 관리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그것들을 막내아들한테 맡기셨지만 여전히 큰소리를 치셨다.

입원실도 1인실을 고집하셨고, 병원 밥은 못 먹겠다고 하시며 매 끼니 밖에서 사 오라고 하셨다. 나도 좋아하시는 홍어 무침과 갈비찜을 여러 번 해서 날랐다.

미안한 생각이 들면 엄마는 물량공세를 펴셨다. 돈이면 자식도 꼼짝 못 할 것이란 믿음이 강하셨다.

병원 이동을 책임졌던 막내한테는 차가 낡았다고 suv 차를 선뜻 사 주시고, 나에게도 뭐가 필요하냐고 자꾸 물으셨다. 어쨌든 나에게는 세탁기를, 언니는 에어컨을 사 주셨는데, 그런 기분 내키는 대로의 물량 공세는 거리가 멀어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다른 두 아들과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신다며 괜찮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것들이 나중에 큰 부작용을 낳게 한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바람대로 똘똘 뭉쳤던 오 남매도 돈에 대해서는 손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퇴원 후 막내 부부는 엄마를 계속 모실 생각도 있다며 거실을 엄마 중심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올케는 끼니마다 입맛에 맞는 반찬을 준비하고, 매일 목욕을 시켜드리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수더분한 막내 올케도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하시는 굴비 구이는 구울 때 기름이 너무 많아도 적어도 안되었다. 겨우 몇 점 드셔서 남긴 걸 데워 내놓으면 수저를 놓으셨다. 끼니때마다 바꿔 드리는 반찬도 몇 번 젓가락질만 하셨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드시고 싶다던 음식이 가득했다.

목욕을 시켜 드릴 때도 비누질을 두 번 해야 하고, 조금 세게 밀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시고, 말릴 때도 수건 여러 장을 써야 했다.

내가 자주 들르고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 가지고 간다 한들 같이 사는 동생 부부의 고충을 덜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막내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때 막내는 거실에 놓은 엄마 침대 밑에서 잤다.

엄마는 원래 잠도 없는데 잠자리가 바뀌어 밤새 뒤척이고, 마침 감기에 걸린 동생은 콜록거리고 가래를 뱉어내느라 잠을 설치고 있었다. 둘 다 잠 못 이루는 한밤중에 막내는 가래 때문에 또 일어났다. 휴지에 가래를 뱉는 순간 막내는 희미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앉아있던 엄마가 동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셨다.


"에이, 더러워."



나는 엄마를 위하는 막내의 마음이 진심임을 안다. 혼자 계신 엄마를 가엽게 여겨 엄마의 어떤 처사에도 웃음으로 넘기고,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짜증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엄마도 늘 막내를 '사랑하는 나의 막내'라고 부르며 두 형들보다 티 나게 좋아하셨다. 내가 아는 엄마는 그런 면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솔직하게 대처하실 분이다. 막내를 위해서는 돈을 아낌없이 쓰셨던 것이다. 두 올케들이 '어머니는 막내네 밖에 모른다'며 불평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도 끝도 없는 요구와 쌀쌀한 말로 효자 막내 부부가 지쳐가고 있었는데, 그날 밤 엄마의 한 마디로 막내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엄마 원래 그러시잖아, 말씀 막 하시는 거 너도 알잖아.' 이런 말이 그때는 공허한 말이었다.

오 남매가 모여 1주일에 한 번씩 교대로 찾아뵙자는 절충안에 합의하고, 엄마를 다시 시골로 모셔다 드렸다.

엄마의 의사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엄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다행히 '내 집이 제일 좋다'시며 그런 결정에 서운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직 기운도 있고 자존심도 든든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앞에 어느 누가 예외가 있을까?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대소변 실수를 하셨다.

나는 늘 화장을 곱게 하고 우리가 일어난 자리에 떨어진 머리카락에도 쫓아다니며 줍던 엄마가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후회할 짓을 계속 저질렀다.


감추기에 바쁜 엄마가 실수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 길로 기저귀를 사 와서, 한사코 거부하는 엄마를 모질게 나무라며 기저귀 착용을 강요했다.

생신을 맞아 싫다는 엄마를 모시고 외식을 나갔다.

식당 화장실에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엄마를 찾아가니 실수하신 변을 처리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너무 속상해서 왜 나를 부르지 않았냐고 큰소리를 냈다. 늘 기세등등하던 엄마는 쩔쩔매며 미안해하셨다.



나는 그때 그것이 엄마 의지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돌아가신 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다, 나의 무지한 행동이 얼마나 엄마를 궁지에 몰았는지 후회와 미안함에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니 엄마는 금세 변하셨다.

또다시, 잠깐 병을 고치기 위해 집을 비운다는 생각으로 올라오셔야 했다.


의외로 요양병원을 내 집이라고 하시며 잘 적응하셔서 안심할 즈음,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외롭고 무서웠어."

"이제 혼자서는 못 것 같다."

그제야 엄마 방문 앞에 세워둔 야구방망이만큼 튼튼하고 긴 막대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예전처럼 당당하게가 아니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서 연금통장과 도장을 찾아다 놔.'


그때 엄마의 분신인 통장과 도장은 장남한테 맡겨져 있었다.


나는 일요일마다 면회 갔지만, 곧 코로나가 모든 것을 막아버렸다.

또 엄마만 외롭게 남겨놓아야 했다.


겨우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엄마의 생이 거의 다 된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자식들과 살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평생 그러고 싶으셨는데 숨기셨을까?

하지만 엄마의 소망을 들어드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연금 통장도 끝내 손에 쥐어보지 못하셨다.

그렇게 애착하던 엄마의 둥지로 영영 돌아가지도 못하셨다.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고 힘들게 숨을 몰아쉬던 엄마, 사랑한다는 말에 손가락을 움직여주던 엄마, 이마는 따뜻한데 발이 차디차던 엄마, 기계의 그래프는 아직 움직이는데 운명을 하셨다는 엄마.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엠블런스 안에서 삽시간에 관 속에 누워 내 옆에 계셨던 엄마.

작은 하얀 단지로 변한 엄마.



유별난 엄마의 행동을 보며 나는 늘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정을 떼려고 저러시나?'


그런데 그런 엄마가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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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에

엄마는 50년 동안 그리워하던 아버지와 드디어 함께 누우실 수 있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