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 - 붓다의 원음』을 읽고
불교는 가깝지만 먼 종교다. 한국사 곳곳에 등장할 뿐 아니라 우리네 사유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알고 있지는 않다. 윤회, 해탈, 열반 등 다양한 불교적 어휘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도 오해를 받고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 대해 갖고 있던 여러 오해들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 중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오해였던 윤회와 열반을 중심으로 하여 새롭게 알게 된 내용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불교의 무아와 윤회는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없다면 윤회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오히려 윤회와 무아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먼저 무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정말 내가 없다면 지금 타자를 치고 있는 나, 커피를 마시는 나는 무엇인가? 너무나도 비상식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내가 없다라는 말이 정말로 이 순간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무아가 말하는 것은 상일주재한 본성으로서의 아트만이 없다는 의미이다. 감각도, 행위도, 사유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불교가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하여 상일주재한 나의 존재를 취하는 것이다. 이 때, 나의 활동을 불교에서는 근(根)이라 하며 총 6개의 근이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5개의 근과 의(意)근에 의지한다. 5개의 감각활동에 사유활동을 더해 총 6개의 근이 있다. 이것들은 살아가는 내내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이것들에 근거하여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 인식 대상으로서의 외부세계의 존재를 불변하는 것으로서 상정하는 데에 있다. 이들을 입처(入處)라 하며, 인식 주체로서의 나는 내입처, 외부세계는 외입처라 한다. 다시 말해 무아를 통해 부정하는 것은 근이 아닌 입처이다.
왜 입처는 부정되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불변하는 무언가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을지언정, 일정 기간 동안은 불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을 생각해보자. 10년 전에도 조민규는 있었고 지금도 있다. 10년 전과 지금의 내가 물론 변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변함없이 조민규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조민규의 다른 부분은 변해도 조민규의 본성은 유지되었다.” 이 본성이 바로 아트만이 될 것이다. 모든 것 속에는 아트만이 있다. 가위에도, 마우스에도, 노트북에도 말이다. 이것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가위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자른다는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날이 무뎌진 가위도 있다. 또 칼도 자른다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을 가위라 하지 않고 날이 무뎌진 가위를 가위라 한다. 우리는 그저 유사한 특정 형태에 무엇에게 무엇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의 불변하는 본성을 가정한다. 즉, 나의 의식이 불변하는 외부세계로서의 명색(名色)을 가정한다.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식(識)에서 명색이 연기한다고 말한다. 상일주재하는 본성은 없다. 다만 나의 의식이 그러한 것을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을 입처라 하며 그러므로 불교는 입처가 거짓된 망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활동은 있지만 활동의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불변하는 본성을 전제할 수는 없다. 이를 두고 “업보(業報)는 있지만 작자(作者)는 없다”고 한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업보의 순환은 있지만 업을 짓는 주체도, 보를 받는 주체도 상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중생은 자아와 세계, 그리고 세계 속의 대상들을 분별한다. 12입처를 기반으로 하여 나의 내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6계(안이비설신의)이고 외부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외6계(색성향미촉법)이며, 둘 사이의 관계로서 내6계를 통해 외6계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6식계가 있다. 이것이 중생이 바라보는 우주의 실체이며 모두 합쳐 18계라고 한다. 18계는 이렇듯 12입처로부터 형성되는 우리의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나아가 자신의 식이 내6계를 통하여 외부의 명색과 만난다는 중생의 착각을 가리켜 촉(觸)이라 한다.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무명에 가리고 애욕에 묶여있는 상태가 12입처이다. 범부들이 12입처의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분별하는 의식인 식이 발생한다. 이 식이 발생하면, 안이비설신의로 된 몸 안에 사물을 분별하는 6식이 있고, 몸 밖에는 색성향미촉법으로 된 이름과 형태를 가진 사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중생의 의식상태를 붓다는 18계라고 불렀다. 근본불경의 여러 곳에서 촉은 18계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다.”
상일주재하는 본성이 없다면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만일 본성이 있다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완전한 존재들로만 이뤄진 세계가 있고 그것의 모상으로서 이 세계를 말하면 된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사고를 거부할 것이다. 완전한 존재, 곧 불변하는 본성들을 인정할 수 없다. 세계는 무한한 변화 그 자체이다. 변하지 않는 본성은 없으며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고 서로를 원인으로 하여 잠깐씩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를 연기라 한다. 연기는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1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12연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삼세양중인과설이 소개되고 있다. 한 번 살펴보자.
12연기는 무명(無名)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6입처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의 12가지를 의미한다. 삼세양중인과설은 이것들을 다음과 같이 배치한다.
먼저는 미혹이 있고, 그 미혹으로 인해 업이 생기며, 미혹과 업을 원인으로 하여 보가 결과로 나타난다. 이 보에는 다시 미혹이 생기고 업을 만들며 또 보가 나타난다. 무명이 과거의 미혹이며 이로부터 행이 업으로 나타난다.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하여 식, 명색, 육입처, 촉, 수의 다섯가지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중생의 삶이다. 중생들은 무엇을 갈망하고 취하고자 하는 미혹을 받고 그로부터 자아의 존재를 가정한다. 즉 유라는 업을 짓는다. 그 결과로 생과 노사라는 미래의 보가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삶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생사윤회가 결과로 나타나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윤회관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런 생각에 삼세양중인과설을 잘못된 해석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12연기를 읽는 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유전문이고 하나는 환멸문이다. 유전문이라 함은 중생들이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중생들의 잘못된 생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삼세양중인과설은 바로 이 유전문에 대한 해설이다. 늙고 죽는 것은 고통인데, 끊임없는 윤회를 통해 이것이 반복되므로 삶 전체가 고통이다. 이것이 12연기를 뒤에서부터 읽어내는 역관(逆觀)이며 고성제를 이룬다.
또한 무아를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은 무명에 가려져 업을 짓고 상일주재하는 자아의 존재를 가정하므로 이 자아가 끊임없이 윤회하며 고통을 받게 된다. 즉, 이러한 고통이 반복되는 이유는 상일주재하는 자아의 존재(有)에 대한 집착(愛取)이다.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형성된 허망한 생각들이 모여 실재로서 조작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이 유전문을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어낸 순관(順觀)이며 집성제에 해당한다.
즉 무아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관점에서 12연기를 읽어낼 때, 삶은 언제나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다. 이것이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깨달을 경우 어떻게 바뀔까? 이것이 바로 환멸문의 가르침이다. 생사가 고통이라면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명을 없애야 한다. 이것이 환멸문의 역관이며 멸성제에 해당한다. 이런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명을 없애어 바르게 보니(正見)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환멸문의 순관이며 도성제에 해당한다. 즉 불교의 사성제는 12연기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이렇게 보건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처럼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읽기에 우리의 모든 순간들이 다 윤회의 과정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들은 없다. 식으로부터 명색이, 그리고 그 명색에 의지하여 다시 식이 증장하는 모든 순간들이 결국은 연기이며 윤회이다. 흔히 ‘전생의 나’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제의 나’를 생각하며 ‘다음 생의 나’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일의 나’를 생각한다. 매 순간 우리는 다시 생하고 노사하며 그로부터 고통을 느낀다. 이러니 결국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 고통의 원인은 ‘나’이다. 정확히는 그릇되게 가정된 나이다. 일체 현상은 그저 흘러갈 뿐인데, 흘러가야 마땅한 것들에 이름을 붙여놓고 잠시라도 멈추려고 전전긍긍하니 삶이 고통인 것이다. 윤회의 고통은 돼지로 다시 태어나기에 고통인 것이 아니라,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하는 집착이 삶 전반에 걸쳐 반복되기에 고통인 것이다.
집착하여 자아를 세우고자 하는 중생들이 자아라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5온이다. 이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를 의미한다.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다섯 가지가 사실 중생들이 자아라고 착각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다섯 가지는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활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죽기 전에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활동 자체가 아니라, 이런 활동을 실체화하여 자신의 존재로 삼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는 5온이 아니라 5취온, 즉 자아로서 취해진 5온이다. 부처의 삶도 중생과 마찬가지로 5온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무아를 깨달은 부처는 5온을 취해 자신의 존재로 삼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고 사태를 바르게 볼 뿐이다. 이렇게 5온을 취해 허구적인 자신의 삶을 구성하지 않는 바른 삶을 명촉(明觸)이 나타난다 하며, 이런 부처의 삶을 가리켜 5분법신이라 한다. 5분법신과 5취온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 이에 대해 본문의 설명을 살펴보자.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지각되는 지각의 내용을 실체화하여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고서 자신의 몸을 유지하려는 욕탐을 (...) 일으키는 것이 5취온의 색이라면, 색이 무상하게 연기하는 법이라는 것을 반야로 통찰하여 욕탐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과 함께 연기한다는 연기의 도리에 따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악행을 멀리하는 것이 5분법신의 계신이다.
5취온의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락의 감정에 흔들리고 있는 산란한 마음이 5취온의 수이고, 욕탐을 버리고 계율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항상 고요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정신이다.
무명의 상태에서 체험의 내용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사유작용이 5취온의 상이라면, 모든 법이 연기한다는 것을 알아서 자아와 세계는 무아이며 공이라는 것을 지혜롭게 통찰하는 것이 5분법신의 혜신이다.
욕탐으로 유위를 조작하여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5취온의 행이라면, 지혜로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통찰하여 가장 가치 있는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5분법신의 해탈신이다.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존재의 생멸과 자신의 생사를 인식하는 것이 5취온의 식이고, 연기하는 일체의 법은 무아이고 공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업보만 있을 뿐 작자는 없기 때문에 자신은 본래 생사에서 해탈해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 5분법신의 해탈지견신이다.”
즉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정확히는, 모든 사람은 이미 부처이다. 다만 저마다의 집착이 각자의 불성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열반은 어떤 영적이고 신비한 무엇을 얻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해탈 역시 윤회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이를테면 천사가 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윤회가 너무나도 지극하고 당연한 섭리라는 것을 깨닫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모든 사람이 부처이고 모든 만물이 우주이다. “공의 세계에서 무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평등하다. (...) 실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을 돕고 서로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진다. 미운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에게 미운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미운 것은 내가 나의 삶에 집착하는 가운데 상대방을 미운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음(一切唯心造)을 깨닫는 것이 부처의 길이며 이로부터 자비행의 실천이 가능하다.
이상에서 불교의 윤회를 중심으로 본문을 요약해 보았다. 사실 나는 기독교인인지라 불교에 대한 막연한 선입관이 특히 많았던 것 같은데, 책을 읽으면서 불교철학이 상당히 깊고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것이 배움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선입견, 무지로부터 비롯된 맹종의 사슬을 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주의 깊게 들어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