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고르기아스 :연설술에관하여' 서평
말을 잘한다는 것, 그것은 통념적으로 타인을 설득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만들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며 플라톤의 대화편 중 ‘고르기아스’ 편의 고르기아스와 폴로스가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이러한 사회통념에 일갈을 가하고 있다.
본문에서 소크라테스가 가하는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말해지는 ‘말을 잘하는 것’, 곧 연설술이 목표한 바를 제대로 이룰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그런 행동이 이익이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이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통념상 말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이며, 설득하는 이유는 나의 말이 옳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순간 옳고 그름에 대한 어떤 확고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말에 따르면 연설가는 제대로 된 지식 없이도 연설술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고르기아스가 말하는 연설술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행위는 가능한 한 좋은 것을 목표로 하므로 연설술 역시 좋은 것을 목표로 할 텐데, 연설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으므로 그가 심어주는 확신은 잘못된 것이기 쉽다. 좋은 것을 목표로 했는데 잘못된 길을 간다는 것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 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므로 연설술은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을 제대로 된 기술이 아닌, 그럴듯한 즐거움만을 목표로 하는 ‘아첨’으로 본다.
다음 문제는 이런 연설술이 이로울 수 있는지이다. 이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인다. 애초에 연설술의 목적이 나의 의도대로 타인을 움직이는 것이고, 나는 당연히 내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위와 거의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익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할 뿐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좋고 나쁨을 판단할 지성이 없다면, 연설술은 그저 주사위를 던지듯 오지 않은 미래를 운에 맡기는 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큰 이익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고르기아스 편에서 논의되는 내용 중 절반 이상은 ‘연설술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무색하게도 참된 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본문의 논의는 이런 식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며 연설술에 관한 내용은 이 이상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분량도 연설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고르기아스와 폴로스와의 대화보다 정의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칼리클레스와의 논의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저작이 ‘정의에 관하여’가 아닌, ‘연설술에 관하여’인 이유에 대해 오래전부터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대화편은 누가 뭐래도 연설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소크라테스 자신이 참된 연설술이 무엇인지, 진실로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연설술은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전혀 쓸 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고르기아스를 비판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르기아스가 옳고 그름을 연설술을 통해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으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모든 기술은 적용되는 대상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라는 명제에 위배된다. 연설술이 쓸모가 있는 것은 그가 정의에 대한 지식을 먼저 갖춘 후이다. 그 후에 그것은 꽤나 쓸모가 있다. 바로 지식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실제로 필레보스 편에서 이러한 설명이 있다.) 이 경우 연설술은 아첨의 지위를 넘어 기술의 영역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여러 대화편에서 보여주듯, 그는 일종의 민중계몽을 목표로 했으며 시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정치가라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철학의 청자를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기술은 매우 유용하며 적용되는 대상인 청자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말 잘하는 법은 올바름에 대한 지식이 선행한 이후에 성립하며 그것을 잘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본 대화편에서 몸소 그 예를 보이고 있다. 먼저 고르기아스와의 대화에서,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지식에 오류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폴로스와의 대화에서는 그에게 질문권을 양도하면서 몸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실험해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여러 비유와 긴 연설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련의 교육적 흐름이 제대로 된 말 잘하는 법의 실례이며 아마도 이것을 보이기 위해 고르기아스 편은 다른 대화편들과는 다른 양식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말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나 올바름을 고민하는 사람은 적다. 의(義)를 알지 못하니 저마다 이(利)를 이야기한다. 이를 말하는 사람은 이기려고 하지만 의를 말하는 사람은 대화하려고 한다. 작중 소크라테스는 바람직한 대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어쩌면 나 역시도 이를 말하는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른다. 괜스레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