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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Mar 18. 2021

트와이스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트와이스 앨범 타이틀 곡들을 중심으로 본 자본주의적 함의

요즈음 k-pop의 시대라고들 하더라. 본래는 국내에서 젊은 층을 위주로 소비되던 음악들이 세계로 뻗어나가 한류를 선도하고 있다고. 그 원동력으로 많은 사람들은 가수들의 빼어난 외모와 가창력, 퍼포먼스나 팬서비스 등을 꼽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사의 내용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많이 부족했다. 물론, 국내 아이돌들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었던 여러 원인들 중 가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가수란 본래 노래하는 직업이며 노래의 본질은 가사에 음계를 붙이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문화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장차 k-pop이 구축해갈 세계관 속에서 가사에 대한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퍼포먼스가 외면이라면, 가사는 내실이다. 그리고 그 가사는 필연적으로 시대를 반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처음 이 글감을 떠올린 것은 갓 자대에 배치된 이등병이었을 때였다. 그 때 생활관 선임병들이 틀어놓은 트와이스의 yes or yes 뮤직 비디오를 보며 나는 이 노래 속 자본주의의 마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 이것으로 글을 써보겠다 다짐했다. 이하에서 나는 가장 문제적이었던 yes or yes의 가사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노래들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yes or yes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굉장히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부분은 다현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파트이다. 이 때마다 그는 금화와 함께 등장하며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온 무대 위에 금화가 뿌려진다. 나는 이 장면에서 매우 큰 위화감을 느꼈다. 가사의 내용은 분명 사랑이야기인데, 어울리지 않게 금은보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노래가사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가사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무엇보다도 연속해서 반복되는 후렴구가 그렇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 yes or yes” 선택지가 주어졌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화자는 상대방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속이면서 결국은 하나의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현 시대 대한민국을 잠식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원리이다. 사회는 청춘들에게 자유를 이야기한다. 너희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은 너희의 ‘노오오오오오오오력’ 여하에 달린 것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것은 그저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자본주의의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다. 노력할 기회조차 박탈된 누군가에 대한 현시대의 의도적 간과가 이 노래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의 노래 속 화자는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소유욕’을 드러낸다. “내가 원래 이렇게 이기적이었나. 무언가 이렇게 갖고 싶었던 적 있었나.”라는 가사 속에서 화자가 ‘갖고 싶어’ 하는 무언가는 상대방이다. 인간 역시 하나의 자본과 재화로서, 누군가에게 귀속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은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자본주의의 맹점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트와이스의 작품 전체에서, 적어도 타이틀곡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최근에 발매된 MORE & MORE를 살펴보자. 화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더욱 원하며 자신도, 상대방도 결코 욕망을 멈출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FANCY에서 화자는 상대방에게 홀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행복을 영위한다. 그런 화자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다. TT에서 화자에게 사회는 ‘얼굴값’을 할 것을 요구한다. 즉, 사회가 매긴 가치에 맞게끔 행동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가사의 내용은 다분히 직관적이다. 화자는 무언가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결국 화자의 태도는 끝끝내 수동적이다. 여기서 ‘수동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와중에 가장 독특한 곡을 꼽으라면 나는 ‘Feel So Special’과 ‘DANCE THE NIGHT AWAY’를 고르겠다. 이 두 곡은 이례적이다. 먼저 전자를 살펴보자. 이 곡의 의외성은 아마도 처음으로 고독을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곡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소외감과 고독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너’를 통해 화자는 다시 무명(NOBODY)의 세계에서 규정된 누군가(SOMEBODY)로 귀환한다. ‘너’를 통해 규정된 나는 무의미성을 벗어던지고 ‘특별한’ 누군가가 된다. 여기서 역시 수동성의 개념이 나타난다. 트와이스의 화자는 어떤 일도 스스로 하는 경우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선택을 기다리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트와이스의 노랫말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 역시 유의미할 수 있다.) 특히 이 곡에서 화자는 ‘너’의 부름을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제껏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곡에서 ‘너’가 ‘자본’을 상징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노래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현상 중 하나인 베블런 효과, 과시소비에 대한 기막힌 설명이다. 세상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나는 ‘너’, 곧 돈만 있다면 다시 웃을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곡은 DANCE THE NIGHT AWAY이다. 이 곡이 독특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화자가 요구하는 내용이 기존의 세계관과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펴본바 트와이스의 세계관에 대한 키워드는 소유욕과 수동성이었다. 그러나 이 곡에서 말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것이다. 이 곡에서 마침내 트와이스의 중심주제였던 ‘소유욕’이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화자는 “이 순간의 특별한 행복을 놓치지 마”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한다. ‘놓치지 마’라는 언명이 ‘잡아’라는 의미임을 생각해볼 때, 화자의 시야 속에서 행복은 소유 가능한 무언가이며, 이제 트와이스의 음악적 세계 속 소유의 대상은 타인을 넘어 ‘행복’과 같은 정신적인 무언가에까지 확장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더욱 기이한 것은 ‘순간의 특별한 행복’이라는 점이다. 이 노랫말 속에서 행복은 영속적인 것이 아닌, 순간적인 것으로 취급되며 그것은 찰나 이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즉, 희소하기 때문에 더욱 유의미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잡아야만’ 하는 것,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나의 세계 속에 현출한다. 희소한 것을 소유하여 행복을 얻는 이런 도식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그것이다.


앞서 우리는 트와이스 세계관의 키워드로 ‘수동성’을 꼽았다. 그러나 DANCE THE NIGHT AWAY를 보면, 그것이 단순한 수동성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곡 속에서 화자는 청자에게 능동적으로 행복을 잡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이전까지의 논의와는 사뭇 다르다. 두 가지 태도는 양립가능한 것일까. 약간의 전회를 통해 분명 그럴 수 있다. 트와이스 세계관에서 키워드는 사실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다. 타인이 나에게 명령한다는 의미에서의 수동성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의존성’이다. 화자는 결코 스스로 자립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처지를 족하게 여기는 ‘안분지족’의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며,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하고자 하고 특별함을 느끼고자(FEEL SO SPECIAL)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소유해서 특별해지고자 하는 열망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인간소외’ 문제에 다름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것이 단순한 권고사항처럼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로서, 자명하고 당위적인 명령으로 말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성서 속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트와이스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마라”, 혹은 “YES OR YES, 둘 중에 하나만 골라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내 생각에 CHEER UP 이다. 이 곡을 통해 트와이스는 3세대 아이돌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난 냉전시대의 반복이라 할 만 하다. 내가 이 곡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곡의 중의성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도 속에서 화자는 자본을 욕망하는 주체였다. 이 곡 역시 그렇게 볼 수 있으며 이 경우에 특별히 이 곡에 주목할 이유는 없다. 이제껏 살펴본 구도가 동일하게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 곡의 화자를 자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시대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본, 혹은 재화를 이 곡의 화자로 볼 수도 있으며 이 경우에 이 노래는 매우 큰 임팩트를 갖게 된다. 화자인 자본은 상대방에게 “좀 더 힘을 내!”라고 말하며 노오력 이데올로기를 양산한다. 자신, 즉 재화를 갖기 위해 끊임없는 노오력을 종용하고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CHEER UP"이라는 제목과 후렴구가 ”취업“과의 발음 유사성을 이용한 고도의 언어유희로 들린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트와이스 노래 가사에 대한 비판은 꽤 자주 있어왔다. 성 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한다거나 하는 등의 비판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너무 표면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와이스 세계관에서 정말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자본주의의 우상화와 그에 따른 경쟁, 소유적 행동양식 등을 자명한 ‘윤리의식’화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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