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중심으로
모두가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형이상학을 계승하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유구한 탐구의 역사를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가수 Rothy이다. 특히 Rothy의 신곡 bee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노래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을 따른다. 바로 '나'와 'bee(벌)'의 대립이다. 나는 본질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는 자이다. 그에 반해 벌은 본질에서 벗어나 현상과 의미를 탐구하는 자이다. 이들은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단순한 현상만을 탐구하기에 현상의 원인인 본질, 곧 실체를 잊어버린다. 마치 '빛을 따라가는 사이' 빛의 근원인 '별을 놓치는 것'처럼.
현상에 대한 탐구와 본질에 대한 탐구는 무엇이 다른가? 본질에 대한 탐구 역시 내게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결국 현상에 대한 탐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한 쪽은 다양하게 주어지는 현상들 전체를 분석하여 공통되는 원리를 찾아내어 본질에 접근한다면, 다른 한 쪽은 주어지는 현상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 다르다. 이 노래에서 전자가 나의 입장, 후자가 벌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벌은 나를 'baby'라 부르며 제멋대로의 관념을 나에게 덧씌운다. 그러나 화자인 나는 '나긋나긋'하게 그것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자가 될 바에는 오히려 '나쁜나쁜 애'가 될 것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나는 '보기보다 상냥하지 않'고 '보기보다 달콤하자 않'다. 나쁜 애인 나는 벌들이 구축한 '분위기', 곧 이데올로기에서 적당히 즐기는 척 하지만 '시간이 되면 날아갈', 탈출할 존재이다. 이 비행, 이 탈출은 독사(doxa)로부터의 탈출인 동시에 에피스테메(episteme)를 향한 도약이다. 이제 분위기로부터 탈출한 나의 위치는 '구름 위', 곧 이데아의 세계이다.
나와 벌의 대립은 나의 요구에서 시작한다. 나의 요구는 '이름이 불리는 것' 뿐이다. 즉 나를 제대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벌들은 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얘기하'거나 '우물쭈물 댈'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나의 소크라테스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catch me if you can'이라는 가사는 네 능력이 된다면 어서 나를 정의해보라는 일갈이다. 대체 네가 제대로 아는 게 뭔지 따져보자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현현과도 같다. 이제 화자의 요구는 다음 단계로 향한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함께 더 위로 날아가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이 상대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듯이 화자의 목적도 단순히 상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함께 최고의 범주, 혹은 선의 이데아까지 비상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마음은 화자가 검은색을 '멋이 없다'고 말하며 '다양한 색으로 물들여'달라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왜 검은 색이 싫은가. 검은색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있는 것이다. 뭔가 차있기는 한데 온갖 색이 하나로 엉켜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꽉 막힌' 것이다. 곧 플라톤의 방황하는 원인의 상징이다. 나는 함께 이데아의 세계로 비상하여 방황하는 원인에서 현상을 구제하고자 한다.
이상의 분석에서 볼 때 로시의 노래는 플라톤 형이상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수준의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형이상학을 전복하자 외치는 이 시대 속에서 다시 형이상학으로의 회귀를 외치는 로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