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읽기의 존재론
현 시대 한국사회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여성적’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성의 무엇인가? 그러면 동일한 대상도 누가 갖느냐에 따라 다른 속성을 갖는가? 말하자면 남성이 쥔 컵은 남성적이고 여성이 쥔 컵은 여성적인가? 이건 이상하다. 만약 이게 다라면 여성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적이라는 말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 이면에 단순한 사실 이상의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생산물이 여성적인가? 이것도 비슷하게 말이 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뜨개질은 여성적인데 할아버지의 뜨개질은 남성적인가? 우리가 무엇을 가리켜 여성적/남성적이라 이야기할 때 그것은 대상을 보고 말하는 것이지 대상의 주인을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사실 모든 사람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데 그러면 모든 사람이 여성적인가? 이 또한 이상하다.
그러면 여성적이라 함은 여성에 대한 무엇일까? 이것도 바보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산부인과 교과서가 가장 여성적인 책이어야 한다. 여성을 위한 무엇일까? 이것도 조금 희한하다. 무엇이 여성을 위한 일은 필연적으로 일부 여성을 위한 일이거나 여성 일반을 위한 일이어야 하는데, 일부 여성을 위한 일은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성 일반을 위하는 일이라면 애초에 왜 여성이 차별을 받았는지 말해야 한다. 만일 그 차별이 정당한 것이었다면 여성적이라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차별이 부당한 것이었다면 부당한 차별을 없애는 것은 당연한 정의인데 왜 그것이 추가적으로 여성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여성적이라는 것이 여성 일반을 위한 것이며, 과거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성적이라 함은 자기파괴적이다. 가부장제가 사라지는 순간 여성적인 것도 목표를 잃었으므로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서구 사상사를 되짚으면서 이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 플라톤의 위대한 업적은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찾은 것이다. 두 형태는 바로 정지와 운동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은 무엇을 중점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했다. 그는 상식에 힘입어 정지를 중심으로 지성을 직조했다. 운동은 정지의 결여였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존재는 사실 정지체(이데아)이며 사이 공간은 결핍이다. 즉, 정지 중심의 세계관은 차별을 양산하고 다양성을 간과한다. 참된 존재와 결핍된 존재의 대립은 이후 일자와 타자, 주체와 대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동일한 구도가 단지 이름만 바뀌어 남성과 여성으로 반복되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고 말했을 때, 이는 운동을 정지에 앞세운 것이었다.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말한 것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르트르의 이런 주장을 수용하여 여성 역시 즉자존재가 아닌 대자존재로서 실존함을 말한 것이었다.
즉 지성사적으로 볼 때 여성적이라 함은 정지체 중심의 구도에서 벗어나 운동 중심의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기존의 구도가 일반화를 통해 성립되었다면 새로운 구도는 다양성을, 대립구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물리학은 여전히 정지 중심이며 당연히 ‘여성적’ 물리학은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창조되는 운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매 순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미래를 기투하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운동이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읽기는 반드시 운동 중심의 읽기여야 한다. 인간에 대한 정지 중심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제 맨스필드 파크를 읽어보자.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의 여러 작품 중 가장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굉장히 순종적이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읽기가 바로 전형적인 정지 중심의 읽기이며 남성적인 읽기이다.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은 여권 신장을 옹호해야 한다.’ 혹은 ‘여성은 가부장제에 순응하거나 대립한다.’ 라는 대립적인 구도 속에서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런 편향은 작품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립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 없는 ‘사이’ 공간이다.
우선 패니 프라이스의 위치를 보자. 그녀는 분명 가족이긴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버트럼 가의 수양딸이다. 그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버트럼 가의 불가해한 사이 공간을 의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로부터 배척받는 동시에 모두에게 친근하게 여겨진다. 그녀는 특별히 어떤 행동도 나서서 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모든 사건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게 되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이것이 작품 속에서 몹시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한 가치와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올바르게 사태를 직관하고 판단하는 유일한 사람은 어디에도 명확히 소속되지 않은 패니 프라이스 뿐이다.
간략하게 맨스필드 파크를 살펴보았다. 이런 읽기 방식은 과연 여성적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적이라 함은 여성에 의한 것도, 여성에 대한 것도, 여성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선결적인 대립 구도 속에 포섭되지 않는 가치들을 주목하는 것,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독해는 그저 ‘제대로 읽기’ 이다.
주지해야 할 것은, 여성이 연약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운동 중심의 읽기가 여성적 읽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지체와 운동의 대립과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사실 별 상관이 없다. 전자의 대립이 존재론적 차원의 논의였다면 후자의 대립은 작위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표면적인 문제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 정지체와 운동의 대립이며 또한 대립구도 속에서 모든 문제가 파악되리라는 알량한 믿음이다. 단언컨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들 중 상당수는, 적어도 이미 논의한 제인 오스틴과 더불어 버지니아 울프만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치명적’이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 창조적 예술이 이뤄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 (...) 한 성을 다른 성에, 한 가지 자질을 다른 자질에 대립시키고 우월성을 주장하며 열등함을 전가하는 모든 행위들은 인간의 경험을 단계로 나누자면 사립학교 단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건대, 우리는 여성작가의 글쓰기를 환영할 이유도, 그들의 새로운 작품에 특별히 반응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여성’ 작가로서 보지 말자. 그들을 그저 작가로 보면, 그리고 제대로 읽으면 된다.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 새로운 비평기술을 발전시킬 이유도 없다. 다만 주의 깊고 겸손한 자세로 조심히 읽으면 된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도, 그들의 작품이 여성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독자로서 마땅히 보내는 경의와 존중일 뿐이다. 문제는 여성의 글이냐 남성의 글이냐가 아니라, 제인 오스틴의 글이냐 제임스 조이스의 글이냐, 또 구병모의 글이냐 한강의 글이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이미 선결된 틀 속에서 작품을 읽는 모든 시도는 오류를 내포한다. 작품은 그 자체로 보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