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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재 May 19. 2024

서울 인사동에서 부친 편지

변화는 과거의 기억이 미래와 만나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곳은 활력이 있는 거리이면서도 한국미의 운치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곳곳의 골목마다 이야기가 쌓여 풍경을 아로새기며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는 곳입니다. 근현대 한국 미술과 문학의 산실로 많은 작가들의 사랑방 같은 곳, 바로 인사동입니다. 오늘 이 편지도 인사동의 한 카페에 앉아 쓰고 있습니다. 나전칠기로 만든 찻잔 받침대를 내주셨는데 그 모양새가 예뻐서 자꾸 눈길이 갑니다. 한 번 보니 예쁘고 다시 보니 그윽합니다. 나는 예전부터 인사동의 분위기를 좋아했는데 최근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에 쓰여 있는 인사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에게 건넬 이야기도 그 책에 나와있는 인사동에 대한 소개를 많이 담았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빌려 인사동을 사랑하여 인사동에 대해 공부해 알게 되었고 이제 그 인사동을 보는 나의 눈은 더 깊고 넓어졌습니다.

무슨 말을 먼저 할까 고민하다 골목길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골목길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나는 골목길에 배어있는 정취가 좋습니다. 인사동이 관광지화 되면서 상업적인 느낌이 곳곳에 스며들었지만 그 골목길은 여전히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사동의 골목은 여전히 오래된 건물이 때로는 기와지붕을 머리 위에 얹고 있다가도 때로는 현대식 가옥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 콘크리트 담장도 있고 돌담처럼 꾸몄지만 시멘트로 마감한 조야한 담장도 있습니다. 그런 무규칙성과 무심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다 큰길과 만나기도 하고 순간 막다른 곳에 이르기도 합니다.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으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별로 상관이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막히면 막힌 대로 돌아 나와도 좋고 열리면 열리는 대로 지나가도 좋습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시시각각 어떤 이야기가 담긴 풍경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골목길에서 시간과 목적을 잠시나마 훌훌 털어버리곤 합니다.

인사동은 근현대의 독립운동부터 미술과 문학의 역사가 알알히 새겨진 현장입니다. 지금의 태화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태화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이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은 이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성의 회복을 천명한 명문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필 것이다"라는 문장을 이 인사동에서 천명하는 것은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가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이 마치 예언처럼 다가옵니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전에 민족 대표 중 한 명 이이었던 손병희 선생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태화관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일부러 이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민족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거사를 앞두고도 한 개인의 고초를 겪을 것을 염두에 둔 그 마음이 깊습니다. 나는 이런 배려의 마음이 한국인이 가진 특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근현대 인사동은 고서점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의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 자리에는 한남서림이라고 하는 고서점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여 많은 고서화를 수집한 곳입니다. 겸재 정선과 혜원 신윤복의 화첩도 이곳에서 입수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의미 있는 것은 훈민정을 해례본을 입수한 사건입니다. 당시 중개상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 원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간송은 해례본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그 10배인 1만 원과 수고료 1천 원을 더 얹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간송이 우리 문화를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의 외형적 우수함을 넘어 그 안에 깃든 우리 민족의 문화적 역량과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치하에 억압받고 있는 민중과 문화를 보며 우리의 혼이 담겨있는 문화재를 입수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신과 집념의 결과물이 훈민정음해례본의 입수로 이어진 것입니다. 간송은 6.25 동란에 다른 문화재는 두고 가도 훈민정음해례본만큼은 지니고 가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베고 잤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문화재에 대한 소명 의식과 집념 덕분에 한글을 폄하하려는 그 어떤 협잡에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글을 쓰지 못하고 억눌렸던 문화인들의 글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보복창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인사동에는 서적이 넘쳐났고 고서점, 필방, 표구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고서점은 산기 이겸로 선생의 통문관입니다. 인사동 서점가의 큰 어른이었던 이겸로 선생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2000년 8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이야기인데 당시 월북 국어학자 류열 박사가 딸을 만나기 위해 남한에 왔습니다. 통문관은 류열 박사의 농가월령가를 펴낸 바 있었는데 이겸로 선생은 저자인 류열 박사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았습니다. 류열 박사를 만난 이겸로 선생은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원고료도 못 드렸다면서 50만 원을 건넸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분들이 계셨기에 인사동의 문기는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에 이르러서의 인사동은 화랑과 고미술의 거리로 단장을 하게 됩니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화랑인 갤러리 현대가 들어선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통인화랑이 눈에 띕니다. 고미술품 전문 화랑인 이곳은 지금은 현대 공예품도 판매하고 현대 작가의 전시도 열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그곳에 방문해 고미술품을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단아하면서도 깊은 품격이 느껴지는 수묵화도 있고 비례의 미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멋을 품은 분청사기나 백자도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보면 볼수록 우리 미술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술계도 70, 80년대의 엄혹한 시대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창립 전 개막 당일 당국이 전시를 불허하고 전기를 끊기도 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결심판에 회부하는 등의 짓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미술계를 굴하지 않고 그 길을 이어 갔습니다. 민족미술인협의회를 결성하고 수도약국 골목의 건물 지하를 확보해 전시장을 열고 그림마당 민이 탄생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뜻있는 미술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각자의 위치에서 물러서지 않고 작품활동을 계속해왔습니다. 인사동에서 한국 미술은 그 길을 걷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아갔기에 퇴보하지 않고 오히려 단단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의 발전으로 서구 강대국과 어깨를 견줄 한국에는 이제 대형 갤러리들이 넘쳐나고 작가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능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 데는 인사동에서 꿋꿋이 자신의 활동을 해왔던 작가들의 미술에 대한 사랑과 용기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인사동은 한정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정식집이 많이 들어선 이유를 듣고 놀랐습니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그 토대였던 민주정의당 당사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인사동에 많은 한정식집이 생겼다고 합니다. 난 인사동에 한정식 집이 많은 것이 정말 좋지만 많은 한정식집이 군사독재정권의 여당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사동이 한정식 집으로 단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단지 역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흘러가면서 생각지 못한 흔적들을 남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88년 서울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며 정부는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고 이후 인사동은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고 바야흐로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식당, 카페와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인사동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건물인 쌈지길이 있습니다. 사실 쌈지길은 원래 고층상가가 세워질 예정이었고 이에 12곳의 표구와 공방 등이 퇴거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인사동의 문화예술인들은 이른바 “열두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하였고 이 부지를 인수한 (주)쌈지가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지은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라고 합니다. 쌈지길은 걸어 올라가는 맛이 있는 곳입니다. 보통의 건물이 계단으로 올라가는 반면 쌈지길 건물은 약간의 경사로로 길을 내고 그 옆으로 공예품 가게들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약간의 경사는 별 부담 없고 작은 공방들의 작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나는 이 길을 올라갈 때마다 정겨움을 느낍니다. 고층 상가가 들어섰다면 화려했을지는 모르나 정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쌈지길은 건물 내부에 있으면서도 사방이 뚫려있어 외부와의 단절이 적고 계단으로 층을 구분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낮은 돌담으로 둘러쳐 이웃과 소통하였던 우리의 건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건물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곳에 오고 나갑니다. 쌈지길은 건축물이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사동이 관광지화 되면서 어떤 문화인들은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 아쉬워한다고도 합니다.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가 변화하는 모습은 못내 아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여러 갤러리에서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화랑과 공방, 표구사들이 명맥을 이어가며 인사동의 내력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속살을 더 보고 싶은 외국인들이 오고 가며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사동의 시대적 소명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의 면면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변화 역시 흔적으로 남아 또다시 찾아올 인사동의 새로운 시대적 소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일 수 없습니다. 현재의 변화를 과거의 모습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에 따라 그 변화가 더 좋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개발의 여파로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서울에서 인사동은 하나의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지워버린 장소는 어떤 화려함으로 채운다고 하더라도 본질을 잃은 획일화의 산물로 남을 것입니다. 반면 과거의 기억을 지켜낸 곳은 현재를 지나 다가올 미래에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독창적인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 세월이 빚어낸 독창성이 거리에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며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인사동은 획일화의 시대를 넘어선 지혜로운 조화의 땅으로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기억이 흐르는 현대의 거리 인사동을 걸으며 나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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