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시절이 머물렀으므로 그곳은 청춘의 도시입니다.
나는 부산을 참 좋아합니다. 탁 트인 바다가 도심지 옆으로 펼쳐져 있어 눈이 시원합니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다고들 얘기하지만 내륙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게 바다를 곁에 두고 산다는 것은 부러운 일입니다. 일렁이는 파도가 검은 화강암에 철썩대는 해동용궁사의 기상이 참으로 호쾌합니다. 감천 문화마을의 좁은 골목은 내가 사랑하는 청주 수암골의 골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갈치 시장은 대한민국 수산시장 1번지라고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해안이 한눈에 보이는 달맞이 고개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광안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회센터에서 회 한 접에 소주 한 잔 할 때 나는 그렇게나 자유롭습니다.
부산을 흔히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고 합니다. 아마 규모 면에서 서울 다음가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은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 표현 속에 어떤 우위를 함의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부산은 그만의 매력을 가진 곳입니다. 제 몇의 도시라는 획일화 속에 담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영화 취화선에 보면 천재 화가 장승업이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를 빌려 얘기하자면 부산은 부산일 뿐입니다.
오랜만에 찾은 해운대는 여전했습니다. 구름 한 조각 걸리지 않을 만큼 맑은 날 아침 햇살아래 백사장은 오래전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부산이 나에게 특별한 도시인 이유는 대학시절 이곳에서 했던 친구와의 자전거 여행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향 친구인 김 군과 함께 청주에서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여기 부산에 왔습니다. 부산에서 시작해 김해, 창원과 마산을 거쳐 거제도로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온 2주에 걸친 여행이었습니다. 뜨겁게 쏟아지는 8월의 햇살과 곁을 지나가는 차들의 무심함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페달을 밟았습니다. 몇 만 원 되지 않는 중고 자전거를 구해 집에서 입던 트레이닝 복을 입고 국도 변의 고개를 넘고 또 넘었습니다. 타는 햇살과 거칠게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조치원 역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아침에 우리는 부산역에 도착하였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이곳 해운대였습니다. 밤을 새우다시피 도착하였지만 별로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자전거를 주차해 두고 바다를 보러 백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다 저쪽에 두 명의 예쁜 여성을 보았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는 맘에 든다는 말이었고 두 번째는 전화번호를 달라는 단 두 마디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휴대폰을 물품 보관소에 두고 온터라 전화번호를 저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전화번호를 여기 백사장에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말없이 백사장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나는 번호의 앞을 친구는 뒷부분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 서울과 청주 부산을 오가면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보냈습니다. 나중에 그 둘 중 한 명은 어느 대기업 다니는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전화번호를 받고 나중에 연락하겠노라고 하고 여행을 시작하고 종착지였던 거제도에 도착하여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선대로 향하는 그 길은 바위산을 좌측에 끼고 푸른 강이 휘돌아가는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한참을 타고 가던 중 김 군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여 주유소에 잠깐 멈추었습니다. 친구가 화장실을 가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작은 낚시 용품점이 보여 들어갔습니다. 사장님이 나를 보더니 외지인임을 알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렇게 얘기가 시작해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친구가 돌아와서 우리는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에 갑자기 친구가 멈추더니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번호를 주고받은 여자가 오늘 저녁에 볼 수 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신선대를 보러 가면 마지막 배시간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거제도에서 하루 묵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신선대를 보러 와서 갑자기 발길을 돌릴 수 없다고 했고 이 친구는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추었습니다. 아까 그 낚시 용품점의 사장님이셨습니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셔서 신선대에 간다고 하니 자신도 거기에 간다면서 자전거를 트럭에 싣고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한 뒤 트럭에 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절약해 신선대도 보고 마지막 배도 타고 무사히 부산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여인과의 만남도 성사되었죠.
그때 친구가 화장실을 가야 했고 나는 낚시 용품점을 보고 들어가 사장님과 얘기를 하게 되었고 사장님은 그날 가게를 닫고 신선대로 낚시를 하러 가야 했고 그 시점이 바로 그때였고 사장님의 차가 자전거 두 대는 실을 수 있는 트럭이었다는 그 우연의 연속으로 우리는 그때 가장 중요한 소기의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젊은 두 청년의 도전을 하늘도 알아준 것이었을까요.
청춘이었습니다. 치장하지 않아도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백사장 모래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우정은 굳건했고 사랑은 뜨거웠으며 페달을 밟는 다리는 단단했습니다. 주머니에 돈은 얼마 없었지만 삶의 그 어느 시절보다 풍요로웠던 때입니다.
나는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김 군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워 학창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던 친구입니다.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술집에서 일하고 아침 수업에 가서 정신없이 졸았다며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는 자주 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어느 때는 술에 취하신 그의 어머니와 집안 물건이 망가질 정도로 심하게 다투던 소리를 들으며 밖에서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시절 그는 날이 선 바람을 일상으로 맞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힘든 내색도 별로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언제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것을 잘 모를 것입니다. 내가 그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평생을 위한 많은 추억들을 쌓았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유학생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본에 정착했습니다. 그동안 또 많은 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제법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지라 일 년에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만난다고 해도 아이 때문에 오래 보지 못하고 보통 일찍 들어갑니다. 새벽을 달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던 그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그 시절은 지나 간 듯합니다.
생각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어른이 되니 청춘은 물러났습니다. 밀물과 썰물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물러나는 청춘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푸르렀던 여름은 저물었습니다. 나는 또다시 어떤 색으로 빛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빛날 수 있길 바랍니다. 찬란한 푸른빛이 될 수 없다면 여무는 들판의 색 같았으면 합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아니라면 선선하게 흐르는 가을바람 같았으면 합니다. 예전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우정은 아니어도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얻은 현명함으로 서로의 우직한 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곁에서 오래도록 머무는 그윽한 시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