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경재 May 12. 2024

담양 소쇄원에서 부친 편지

물은 흘러야 합니다

나는 건축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건축물에는 지은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철학까지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아 그렇습니다. 지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은 여러 감정을 자아내며 현재의 나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 지은 많은 건축물에서 그 맑고 깊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 때 나는 외국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을 동경하며 우리의 것을 낮게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보다 우리의 건축물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건축물은 외형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사용자와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는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담양을 참 좋아합니다. 동쪽으로는 지리산이 우뚝 솟아있고 남쪽으로는 무등산을 듬직하게 두고 있는 담양은 대나무의 본가로 죽녹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담양은 마을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곳입니다. 담장을 따라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저녁 어스름에는 관방제림을 걸으며 가벼운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담양 남부에는 가사문학권으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과거 호남가단의 문인들과 정치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머물던 정취가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담양의 아름다운 풍경 중에서도 나는 소쇄원을 정말 좋아합니다.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 소쇄’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는 곳입니다. 산기슭에 펼쳐진 너른 광주호를 지나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광주천변을 지나고 있자면 소쇄원을 거닐 생각에 즐거워집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쏟아지는 여름의 햇살 아래 배롱나무의 짙은 분홍 꽃이 강변을 수놓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꽃이 지고 가지만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을이 한창입니다. 여름의 끝은 가을의 충만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소쇄원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부터 나는 그동안 지친 마음의 때를 씻는 것만 같습니다. 계류가 편안하게 흐르고 대숲이 드리운 그 길을 걸어 올라갈 때 순간 사위가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종묘 정전 앞의 공간인 월대 앞에 서서 느꼈던 고요함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그 길지 않은 입구에서 나는 생각을 비우고 계절의 모습과 숲의 소리에 오감을 맡기게 됩니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내 소쇄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창인 단풍이 가을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길은 두 갈래로 곧장 앞으로 가도 되고 왼쪽 길로 내려가도 되는데 어디로 가든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왼쪽 길을 택했습니다. 외나무다리가 나오는데 계곡 위로 천연스럽게 길을 내고 있는 모습이 좋습니다. 사실 이 외나무다리는 원래 모습은 아니고 현대에 와서 어느 정도 보수를 거쳤다고 하는데 그전에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돌다리를 건너서 시야를 위로 바라보면 가까이에 광풍각과 돌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광풍각은 청량한 바람과 맑은 날의 달빛이라는 의미입니다. 계곡 한가운데의 단칸 정자로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방을 두고 사방이 마루로 둘러져 있습니다. 욕심을 버린 단 칸 방과 시원한 마루를 사뿐히 감싸고 있는 단정한 지붕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나는 소쇄원의 돌담을 참 좋아합니다. 황토로 마감한 천연스러움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담이 나무를 두르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주인이 기거하는 제월당으로 가는 길에 둘러진 돌담을 보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에서 잠시 끊겼다가 그 나무를 지나쳐 다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던 담이 ㄷ자 모양으로 꺾이는데 그 가운데에 나무가 또 서 있습니다. 필시 그 나무를 생각하고 그 주위에 돌담을 둘렀을 것입니다. 돌담은 나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 베거나 배제하지 않고 수고를 들여 나무를 품었습니다. 나무도 건축의 일부분으로 여겼을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이 돌담을 나는 너무도 좋아합니다.

제월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도 그 의미가 작지 않습니다. 언듯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그 쪽문은 약간 어색하리만치 낮고 작아서 키가 작은 사람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문을 낮게 지은 까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금 멀리서 그 문 쪽을 바라보면 광풍각 위의 돌 담 사이의 문, 또 그것을 넘어선 제월당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층으로 시야 안에 들어옵니다. 만약 문이 크게 지어졌다면 제월당의 모습을 가려 답답해 보였을 것이며 돌담과의 부조화로 전체적인 시야가 부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큰 문 자체가 이곳 소쇄원의 정신과는 맞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 쪽문을 보면서 불편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불편함은 하나의 적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불편함은 반드시 부당함이 아닙니다. 관계의 맺어가는 과정에서 불편함은 그 관계의 완성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쪽문의 불편함은 원림의 전체 안에서 시야의 확보와 건축 정신을 지켜내며 소쇄원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소쇄원의 백미는 흐르는 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맑은 계류가 소쇄원과 처음 만나는 곳에는 담장이 그림 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담장을 돌다리 담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허공에 담장을 두르고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크고 작은 자연석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담장 밑부분의 너럭바위를 절묘하게 받치고 있습니다. 계류는 그 담장 아래를 흘러 이내 경사를 만드는 바위 위로 미끄러지며 속도를 내다가 평탄해지는 아래쪽에서 약간의 수심을 만들고는 편안한 속도를 다시 찾아 흘러 내려갑니다. 경사진 바위를 계류가 타고 흐르기 전에는 세로로 길게 단면을 벤 대나무를 놓아 물길을 다른 한쪽으로 돌리고 그 물이 찾아간 곳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연못을 지나 또다시 작은 연못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한 시절은 그 작은 연못이 채워지고 아닌 시절은 첫 번째 연못에 자연스럽게 머물다 물이 지층에 스며들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흐르는 물이 그대로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소쇄원 정신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사람이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최소한이면서도 매우 정교한 손길로 계곡에 인공을 가했습니다. 그 주변으로 배롱나무, 매화나무, 복사나무와 단풍나무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계절의 아름다움을 듬뿍 느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돌담장과 소박한 기와집이 마치 원래부터 이 자연과 함께 했던 것처럼 어우러져 있습니다. 불편함을 끌어 안아 나무가 그곳에 있도록 하고 시야를 트고 물을 흐르게 하여 더 큰 자유가 깃들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자연이 먼저 있고 인공이 그 품 안에 들어서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먼저고 약간의 변화로 그 모습을 더 편안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곳에 광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선다면 사람들은 부조화에 질려 발길을 끊을 것입니다. 반대로 너무나 빈약한 인공 역시 사람이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박함이든 화려함이든 그 자체로 절대선이 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을 깃들게 하여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변과 관계를 맺어 소통하는 것이 궁극의 선이며 지혜임을 소쇄원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오히려 소외라는 사회적 퇴보를 낳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과 불안함을 탓하게 됩니다. 타고난 심성과 살아가며 쌓은 자신의 개성으로부터 눈을 돌려 허구를 동경합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하는 옷을 입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소쇄원 자리에 경복궁을 들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풍요는 요원할 것이며 그 자리에는 공허함 만이 메아리치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번에 찾을 소쇄원은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한 겨울 속에서도 싱그러운 푸른 대나무 숲을 보고 싶습니다. 기와 위에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얼어붙은 계곡이 봄을 기다리는 그런 어느 겨울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01화 청주에서 부친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