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한 대로처럼 살 수 있는 삶은 없습니다
당신께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는 시작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최근 사랑에 실패하여 상처받았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생일은 더 이상 기쁘지가 않습니다. 자신만만하던 젊은 시절은 이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진심이 아니라 낮아진 자존감 때문인 것만 같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들을 자꾸 헤아리고 지난 실수들을 되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아프고 외롭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한 시작인지 좀처럼 잡히지가 않습니다. 아니 애당초 시작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무수한 연속으로 채워진 인생에서 시작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휴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예감 같은 것이 듭니다. 아픔이 침전하여 서서히 치유되고 성숙하는 과정이 시작이라는 말에 깃든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고향에 왔습니다. 나의 고향은 청주입니다. 대학 시절 이후로는 서울과 외국을 오가며 타지에서 지냈습니다. 지금은 본가도 세종시로 이사 가서 고향에 들를 일은 명절에 이따금씩 친구들을 보러 갈 때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저를 명절 친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제는 많은 친구들이 연락이 끊겼는데 그래서 남은 친구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청주 초입의 가로수길에서 나는 항상 마음이 편해집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아름답게 늘어선 길입니다.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이 다친 상처를 쓰다듬는 것 같습니다. 긴장했던 어깨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지난 추억도 떠오르고 친구를 만날 생각에 즐겁습니다. 내 삶의 시작도 고향에서 했으니 다시 시작하는 장소도 고향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내 고향 청주는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오는 곳은 아닙니다. 설악산 같은 겨울의 웅장함이나 동해 바다의 푸르른 광활함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난 이곳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지 않은 산들이 어깨를 기대며 분지를 형성하고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무심천이 담담하게 도시를 흐르고 있습니다. 너무 번잡하지 않은 활기가 여전하고 생활 편의는 충분한 곳입니다. 신축 아파트와 번화가가 들어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변치 않은 고향의 모습은 내게는 안도이고 그래서 배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곳곳에 스며있는 내 유년시절의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고향이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을 사랑하지만 고향이 서울이라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서울은 너무 빨리 변하고 생활의 속도도 빠르고 치열한 듯이 느껴집니다. 이제는 고향에서 보낸 시간만큼이나 서울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서울 근교에라도 가는 것을 좋아하나 봅니다. 삶의 길목에서 지칠 때 나는 고향을 생각하게 됩니다. 순수한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겨있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곳 나의 고향 청주를 떠올립니다. 이곳에 오면 세차게 부딪히던 일상이 넉넉하게 흐릅니다. 천천히 흐르는 일상 속에서 여유롭게 생각합니다.
청주에서 난 수동을 참 좋아합니다. 이곳은 내가 살던 동네는 아니지만 학창 시절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작은 공부방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늘 진지하게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나는 공부방의 오래된 난로 옆에 앉아서 선생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며 지식과 사고를 넓혀 갈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난로의 온기 속에 나의 마음은 아늑했고 틀에 박힌 학교의 공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따금 나는 언젠가 지방에 가서 선생님이 운영했던 공부방 같은 곳을 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하나의 소명을 실천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경쟁 속에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버리고 갈 용기가 없어 그 시절이 올까 싶습니다. 시간은 많이 흘러 이제 그 공부방의 선생님과 연락은 끊겼지만 여전히 나는 그 시절 그곳이 그립습니다.
수동에는 수암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암산 언덕에 있는 동네로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살면서 생겨난 곳입니다. 작은 옛날 집들이 좁디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전후 어렵게 살았을 사람들의 삶의 애환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골목 담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드라마 촬영도 하게 되면서 변모하게 됩니다. 청주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다 보니 카페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수암골은 아기자기한 담벼락 그림도 예쁘고 세련된 카페의 분위기도 좋지만 난 그 골목길을 참 좋아합니다. 좁은 길이 작은 집 담벼락을 두고 삐뚤빼뚤 이어져 있습니다. 언덕길이다 보니 더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난 그 길을 더 좋아합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목길은 우리의 삶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듯한 대로처럼 살 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좁다가 넓어졌다 이어졌다 끊어졌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꺾였다가 다시 돌아서는 변화의 길입니다. 언덕길에서는 숨이 가빠지고 길을 잃기도 하며 어둠이 내린 적막 속에서 때때로 두렵습니다. 그러다 다시 길을 찾고 마음은 고요해지며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골목으로 바람이 통하고 기억이 흐릅니다. 골목길에는 켜켜이 쌓여 온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 이야기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배제하고 공유하기를 반복한 삶의 이야기 판입니다.
삶이 왜 의미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며 겪은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고 나에 대한 불만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기억들은 그 어떤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지난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전한 서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변할 수 없는 것을 흔든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 그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수암골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청주 시내를 바라봅니다. 화창한 날에 햇살은 밝고 시야가 시원합니다. 저 멀리 눈이 닿는 곳에서도 세월을 지내온 오래된 주택가가 펼쳐집니다. 그곳에도 골목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내 가족의 이야기도 있고 내 유년시절의 기억도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도 있고 친구와의 추억도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청주의 수암골에서 시작을 더듬어 찾다가 기억을 떠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