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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봉 Nov 08. 2023

K- 줌마, K-대리, K-차장

부캐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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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업계 돌풍! 일잘러 그녀!

대리에서 차장까지 고속승진!

경단녀들의 희망! 이것이 K-줌마다!


내가 강대리 그럴 줄 알았어! 워낙 일 잘하잖아!! 하하하     

"사장님께서 대리님 그간 노고 인정해서

감사패 들고 오신대요!!"

................

라면 좋겠지만. 

흔한 옆집, 앞집, 뒷집 아줌마가 쓰는 성공 스토리는 결국 휴먼다큐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냉혹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강대리는 그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회사의 전례에 따라 과장을 점프하고 차장이 된 것뿐이다. 눈치하나만큼은 자부했던 나였건만, 과장이란 직책 자체가 회사에 전무했던 것을 왜 지금까지 사내 연락망을 그렇게 보고도 몰랐던가.  


"강대리, 아니 이제 강 차장이지? 축하해~ 우리 얘기 좀 할까?"

'뭐... 과장이든 차장이든 어쨌든 승진한건 맞으니 연봉도 좀 오르겠지? 히히..'

"그동안 강 차장이 일을 너무 잘해줬어. 앞으로 좀만 더 고생하면 또 좋은 일 생길 거야. 

그런데... 연봉 말이야... 사실 강 차장도 우리 회사 일해봐서 느꼈겠지만, 회사 사정이 그렇게 좋은 건 아냐...

프로젝트 하나 끝나면 월급 주고... 그리고 얼마 전에 회사 확장공사도 했고...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가야 할 것 같아... 미안하게 됐어.."


팀장님이 축하인사와 함께 건넨 침방울이 내 뺨에 축축이 묻어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축하와 위로를 함께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그 순간 속에서,

오전까지 시안을 협의하고 있던 자이언트 풍선인형이 생각났다. 

행사용 풍선인형이 기지개도 채 켜기 전에,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기도 전에,

푸시쉭.. 바람이 빠져 철퍼덕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운 기분이었다.


궁상과 궁색의 경계마저 모호한 사측의 변명을 들으면서도

애매한 경력의 '을'인 나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리에서 차장이라는 이름표만 바꿔 달았을 뿐, 회사에서의 자리도...

기존의 쥐꼬리에서 단 1mm도 자라지 않은 '그 길이 그대로의 쥐꼬리 연봉'까지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때만큼이라도 눈치는 챙겼어야 했다. 

무지몽매로 어리석었던 불쌍한 중생은 팀장님이 했던 그 말들에 복선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고, 

내막을 모르는 거래처와 광고주는 기대 이상의 업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승진하셨다면서요~ 얘기 들었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아니, 일을 얼마나 잘하셨으면 대리에서 차장으로.. 앞으로 저희 더 잘 봐주실 거죠?"


그들의 만면에 띈 미소를 보고 있자니 팀장님의 말이 그제야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앞으로 좀만 더 고생하면... 더 고생하면... 고생하면...'


생길 거라던 좋은 일은 기약이 없었고, 바람 빠져 바닥에 드러누워있던 풍선인형은 얼기설기 천을 덧대 구멍을 메우고 손수 펌프질을 해대며 바람을 채워야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 어른 말씀이 이런 뜻인가.. 

업무가 연장, 연속, 연쇄 '3연'의 수렁에 빠지는 동안 차장에 걸맞은 능력치는 수직상승했지만, 지쳐가는 심신으로 언젠가부터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슈퍼맘이 되고 싶었던 이상과 달리, 부캐가 성장할수록, 몸이 고될수록 현실과의 타협이 필요했으며, 아이들이 말하고 보여주는 것에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나 오늘 단원평가 봤다? 100점이야~" 

"우와~ 정말 잘했네!! 대단해!!!" 


차장이 되고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어도, 항상 1호만 단원평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겨우 한 학년 차이임에도 왜 2호는 단원평가가 없는지를... 물어봤어야 했다... 


비글 자매 중, 1호는 겨우 16개월 늦은 동생이 있어서인지 독립적이면서도 철저한 계획형이었고, 2호는 겨우 언니보다 16개월 늦을 뿐이지만 지독히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때때로 등교할 때는 책가방을 잊고, 몸만 갔으며, 하교할 때는 신발을 잊고, 실내화만 신은 채 등장했다.

스스로 다니겠다고 얘기한 영어학원도 곧 흥미를 잃었고, 한국어만 할 줄 알면 되는데 왜 영어를 해야 하냐 반문했다.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 그만둘까도 고민했으나 2호의 영어일기 숙제를 보고 이내 마음을 접었다. 


"2호야~ 'hhh' 이게 무슨 뜻이야? 수업시간에 나온 거야?"

"아~ 그거? 엄만 그것도 몰라? 'ㅎㅎㅎ'잖아~ 'ㅎㅎㅎ'를 'hhh'~"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노력하는 모든 것이 부정당할까 봐. 

2호의 학습적 궤적이 내 눈에 띌수록 산너머 산너머 똥밭이 될까 봐 두려웠기에 더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으며, 회사라는 그럴싸한 핑계뒤에 숨어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끝내 벌어졌고, 

1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 민낯이 드러나게 되었다.    

숨을 쉴 수 있는 '대기'를 '대기업'이라고 쓴 2호는 내게 헷갈렸다며 웃어 보였다. 

티 없이 해맑게.

10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충격적인 점수와 함께 가정통신문에 '노력요함'이라는 글자까지 확인하니, 

더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때 ‘사교육 한번 안 시키고 서울대 갔어요’ 책의 저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교육 한번 시키고 서울에 살고 있어요’ 책의 저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정신 차리고 심기일전하기로 했다. 좋은 선생님을 찾고자 백방으로 학원을 수소문하는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온 2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엄마! 난 어차피 서울대 못 가~ 그러니 학원은 다닐 필요가 없어!!"


나의 부캐가 자라고, 본캐에 무심했던 그동안... 2호에게는 확고한 신념과 믿음이 생기고야 만 것이다. 


"2호야... 넌 뭐가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뭐야?"

"나? 글쎄... 기부나 한번 해볼까? 흐흐흐"


2호의 말을 들으니 지친 심신에 경종을 울렸다. 

남과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2호를 위해 지쳐 쓰러지지 말고 연봉이 쥐꼬리다 욕하지 말고 

남과 같은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며 '미래 기부왕 메이커'이자 '오늘의 자본주의 노예'가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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