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으려고 보는 서평 1
<<님의 침묵>>은 시집이 아닌 하나의 정교한 과녁이다. 이 시집을 처음 펴는 독자는 곧장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를 본다. 한용운은 이 시집의 막을 님으로 여는 것이다. 벌써부터 작가는 시를 ‘내’가 아닌 ‘님’으로 시작하며 주체가 아닌 객체에게 이별의 활시위를 쥐어준다. 시집의 절반 역시 모조리 ‘님의 얼굴’이나 ‘님의 눈물’같이 오롯이 나를 배제한 철저한 ‘당신’만의 세계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을 찾기 시작하며 점점 ‘너’의 세계를 전복하고 마침내 시집은 ‘네네 가요 이제 곧 가요’로 마무리된다. ‘님’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으며 수동적인 자세로 ‘아아 님은 갔다’고 영탄하던 ‘나’는 이제 ‘당신’의 사랑에서 벗어난다. 이 전환은 ‘나’가 ‘당신’을 기다리는 ‘객체’에서 부름을 받고 기꺼이 움직이는 ‘주체’로 변하는 실로 한국문학사의 귀중한 순간 중 하나이다. 우리는 님의 ‘침묵’이라는 제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은 셈이다.
<<님의 침묵>>는 주로 대화체로 이루어져있다. 보통 화자와 청자가 이야기를 할 때 청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자가 ‘침묵’하게 되면 화자는 ‘당신’의 말을 기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님의 침묵>>에서 화자는 일부러 ‘아아’ 목청을 높여 당신을 부른 것이고 ‘오오’라고 외치며 ‘당신’을 향한 사랑을 오로지 ‘아름다운 돌’ 혹은 ‘도금된 물방울’같은 자연물을 빌려 말할 뿐이었다. ‘님’의 침묵을 깨기 위하여 ‘나’는 금강산에게 ‘너는 님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라며 새침하게 묻기도 하고 ‘벗이여 벗이여’라며 답답함에 직접 불러보기도 한다. 하지만 ‘님’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고 오라는 부름조차 없다. 님은 완강하게 ‘침묵’하고 ‘나’는 더 끈질기게 ‘님’의 침묵을 깨뜨리려 노력한다. 결국 참다못해 ‘나’는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침묵이 갖는 의미는 너무나 많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독자는 한용운이 승려였던 것을 미루어보아, 그가 믿었던 불교 사상을 떠올릴 수 있다. 님은 부처로, ‘나’는 불자로 치환하면 힘겨운 기도와 참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신의 ‘침묵’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님은 조선의 독립이었을수도 있다. 조선 해방은 한용운과 같은 지식인들에게는 도무지 물어보고 돌이켜 생각해도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침묵’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적인 제시는 없지만 이 시는 ‘님’을 통해 우리가 불러도 불러도 답이 없는 무수한 것들을 상기시킨다. 님의 침묵은 백마디 말보다 더 강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이별’에는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 파격적이다. 왜나하면 완전한 사랑보다 ‘나’는 외려 님의 꿋꿋한 ‘침묵’만이 있는 이 이별을 더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님의 ‘침묵’이 완연한 세상에 익숙해진 것도, 지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드디어 ‘님'의 침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딛을 힘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님’ 사랑에서 ‘내’ 사랑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여기서 나온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시 마지막 구절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님’의 부재에 어쩔줄 몰라하던 ‘나’가 결국 ‘님’에게 부름을 받고 달려가는 이 모습은 마침내 화살촉이 아름다운 시적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에 도착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은 단순한 민족시집 혹은 불교서적이 아니다. 이 시집은 ‘님’의 침묵 속에 사랑의 부재를 ‘노래’하던 나에서 님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서 마침내 ‘당신’을 위한 사랑에서 ‘나’의 사랑으로 변하는 아름다운 과녁이자 진정한 재생의 사랑이며 ‘불이며 인생이며 마(魔)며 황금(黃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