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셔의 손 Dec 02. 2021

아이돌 팬싸 문화, 이대로 괜찮을까?

팬사인회, 줄여서 팬싸. 팬싸는 단순히 사인을 받는 것을 넘어 짧은 시간이나마 아이돌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팬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행사이다. 앨범을 많이 구매할수록 팬사인회 당첨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팬들은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장의 앨범을 구매하고 이 과정에서 아이돌 앨범 판매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돈을 많이 낸 사람만이 사랑하는 아이돌을 만날 기회를 거머쥔다.


자본주의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이 시스템 때문일까? 팬사인회는 사랑하는 아이돌을 만나 예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이벤트이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기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 남돌 덕후인 필자가 느낀 팬싸 문화의 이런저런 문제점에 대해 나눠보고자 한다.


애교 문화?

지난 몇 년 간 아이돌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며 아이돌에게 애교나 개인기를 시키는 방송을 비판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는, 구시대적인 '꼰대'스타일의 방송 문화가 팬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판의 목소리는 팬싸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팬사인회에서 아이돌들은 팬들에게 애니메이션 캐릭터 성대모사를, 하트와 윙크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요구받고,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애교를 하는 아이돌의 모습은 녹화되어 유튜브나 트위터 등 팬 커뮤니티에 공유되고, 팬사인회에 참여하지 못한 다른 팬들에 의해 다시 소비된다. 멀쩡한 성인 남성이 자신에게 돈을 쏟는 여성을 위해 갖은 애교를 부리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 팬사인회 후기 영상 속 온갖 애교를 부리는 남돌들을 보면서 어려운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유사연애?

케이팝 문화가 유사연애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현역 케이팝 아이돌, 특히 연차가 낮은 아이돌의 공식적인 애인은 "팬"으로 통하고, 따라서 이들에게 연애는 철저히 금기시되어 있다. 심지어 한 아이돌은 설사 연애를 하더라도 밝히지 않는 것이 아이돌로서 팬들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고 말하여 많은 팬들에게 개념 아이돌이라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 유사연애 문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팬사인회이다. 팬싸에서 아이돌이 팬에게 “자기야” “난 네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는 진부할 만큼 흔하다. 팬이 남자 친구가 생겼거나 결혼을 한다고 말하면 삐지는 아이돌의 영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어느 정도의 스킨십도 허용되었다. 깍지를 껴서 손을 잡거나, 근육질 멤버의 팔뚝을 만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이처럼 팬싸에서 설레는 행동을 하는 멤버들이 팬들 사이에서는 '아이돌계 교과서'라 불리고, 이들의 영상이 많은 팬들의 입덕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설레는 남돌 팬싸 일화'가 커뮤니티에 차고 넘칠 정도로 대한민국 남돌들은 팬들에게 설렘을 안겨주기 위해 지금도 ‘열일’하고 있다.


아이돌들은 팬들에게 남자 친구 행세를 하고, 본인의 실제 연인은 목숨을 다해 숨겨낸다. 물론 연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아이돌이 자발적으로 연인 관계를 숨기는 것은 백번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자의든 타의든 세상에 공개가 되었을 때 해당 아이돌이 자기 관리에 실패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실제 연인을 꽁꽁 감추는 동안, 자신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수많은 팬들에게 남자 친구나 할 법한 눈빛과 멘트를 날리는 것은 과연 정상인가.


보상심리?

이러한 애교와 유사연애 문화가 팬의 보상심리와 합쳐졌을 때는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내가 너 얼굴 보려고 월급 다 털어서 여기 온 거야. 그러니까 애교도, 애정 표현도 최선을 다해서 해줘야 돼.'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지불한 금액에 걸맞은 서비스를 마땅히 제공받아야 하니까. 하지만 팬이 원하는 그 서비스가 유아적인 애교와 연인 관계를 연상케 하는 대화와 스킨십이라면? 이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이돌은 초심을 잃었다는 비난을 받고, 이를 잘 수행해내는 이들은 프로 아이돌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많은 아이돌과 팬들이 팬사인회에서 진심 어린 응원을 주고 받고, 건강하고 유쾌한, 때로는 센스 넘치는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동시에 필자가 납득하기 힘들었던 위 문화들은 분명 존재하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 자신을 보러 온 팬들의 진심을 무시하는 몇몇 아이돌의 태도도 물론 문제다.
그렇지만 팬이 돈과 시간,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아이돌이 남자 친구에 달하는 수준의 애정 표현과 그 이상의 애교를 제공해야 하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부승관, 그는 누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