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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Jan 26. 2022

나는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정신과에 간다

소소 43개월

  나의 정신 건강 지킴이 김날따 선생님의 의원은 시내버스로 50분 걸리는 행정구역 상 이웃 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눈부신 볕이 무색하게 추위가 마른 잔디를 하얗게 얼려버린 토요일, 병원에 가기 위해 두 눈으로 희뿌연 날숨을 확인하며 정류장에 있었다. 버스가 정차하고 앞에 선 두 명이 교통카드를 찍는 동안 나의 시선은 버스 옆면에 적힌 공항이라는 두 글자에 멈춰있었다. 주 보던 종착역 이름일진데 오늘따라 평소 없던 욕망이 꿈틀거렸다. 언젠가 이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가고 말 거야! 까운 제주도와 중국부터 꼽기 시작하여 희망회로를 돌리다보니 목적지는 어디라도 좋았다. 공항에 간다는,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만 가슴이 뛰어버렸으니까.


  넉 달 전 이 버스를 처음 타던 날은 아스팔트에 날계란을 떨어뜨리면 계란프라이가 가능할 것 같은 날씨였다. 나는 김날따 선생님이 개원한 병원에 가기 위해 몸이 땀으로 하나가 되어감을 느끼며 정류장에 서있었다. 노선도를 구경하다가 앞으로 타고 다닐 버스가 하필 공항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위에 허덕이기분이 아예 푹 꺼지고 말았다.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도 공항까지 가지를 못하는구나. 처량한 내 신세. 혼 전 자서 씩하게 커다란 배낭 두 개를 몸 앞뒤로 들쳐 매고 세상을 누비던 기억도, 혼 후 남편과 함께 캐리어를 끌고 선 땅을 걷던 기억도 모두 꿈결인가 싶었다. 착각이라고, 꿈이었다고, 그런 삶은 너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누가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날씨가 몹시 더웠고 마음은 몹시 서러웠다.


  이후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매주 같은 버스를 타면서 공항은 내가 감히 욕심낼 수 없는 존재였다. 소멸한 건지, 익숙해진 건지, 외면해버린 건지 모르게 첫날 느꼈던 서러움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공항인'하며 애끓던 심정도 흔적 없이 증발해버렸다. 이제는 내게 병원 가는 버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 크고 작은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로 가세요? 당신 육체와 정신은 건강겠죠? 들은 나와는 다른 보통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어느 날 초등 아이 둘을 포함한 4인 가족이 알록달록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캐리어 놓을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뒷문 바로 뒷자리를 양보했다. 동시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부부의 얼굴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환한 소가 어른거렸다. 그 미소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말 내게도 저런 날이 올까. 내 마음이 낫고 소소와 여행을 다니는 보통의 날이.


  지인 모임에 나가면 문득문득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거 정말 맛있다/나도 그 배우 좋아하는데/거기 너무 가보고 싶어 등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내 영혼은 유체를 이탈했다. 음식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 좋아하는 것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내가 원래 별다른 취향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이 아이를 갖기 전 내게 이끌려 전시와 공연을 보러 다니던 얘기를 하며 내 생각이 오해라고 말해줬다. 아, 나도 기호와 취향을 추구하던 사람이었군. 기억의 냄새는 씁쓸했다.


  회색 콘크리트 같던 일상에 희미한 생기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이번 주에 나는 좋아하는 TV 프로인 「스트리트 걸스 파이터」를 보기 위해 화요일 밤 10시 20분을 손꼽아 기다렸다. 평소 10시 좀 넘으면 자는데 이걸 다 보고 자느라 12시가 넘어 잠이 들었고 다음날 피곤해서 종일 힘들었다. 모습을 본 남편이 그 정도로 좋아하는 게 생겼다니 긍정인 변화라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을 줄일 정도로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 생겼구나. 이게 얼마만이지. 내심 흥분이 됐다. 잃어버린 생의 감각이, 일상이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여.


  거기에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공항을 탐해버렸다. 욕심인 건지,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막연히 꿈을 꿔도 될 것 같았다. 나에게 공항 가고 싶은 기대감을 허락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대기실이 북적인다. 그중에는 소소 또래의 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있다. 작년 김날따 선생님에게 첫 진료를 받던 날 혼자선 외출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우리 가족도 세 식구가 총출동했. 진료 도중에 유모차에 잠들어있던 17개월 소소가 깨어나 검지손가락으로 선생님을 가리키며 "누구? 누구?"하고 물어서 다 같이 웃었.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병원을 다닐 거라곤 생각도 못했건만. 2년도 넘게 지나도록 여직 환자 신세라는 생각에 서글퍼지려는 찰나, 오늘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왔다는 생각이 나를 부드럽게 감다. 그때와는 달리 이 먼 거리를 혼자 왔고, 공항 갈 계획도 생겼잖아. 좋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한번 웃어봐. 마스크 아래로 빙긋 웃음을 지어본다. 입꼬리가 쉽게 올라가고 그대로 몇 초간 유지되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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