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이라는 설계도, 운명과 선택 사이의 거리

유전자가 정한 범위와 생활 습관이 채우는 빈칸

by 상식살이

장수의 비결이 건강한 식단과 꾸준한 운동, 금연에 있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상식으로 통했다.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는 인간 수명의 절반 이상이 이미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이러한 통념을 흔들었다.


연구진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력을 분리하기 위해 대규모 쌍둥이 연구 자료를 활용했다. DNA를 공유하는 일란성·이란성 쌍둥이의 생존 데이터와 백세 이상 장수한 가계의 형제자매 데이터를 정밀 분석했다. 사고나 감염병처럼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외부 요인을 통계적으로 제거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수명 차이의 50~55%가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된 것이다. 이는 과거 연구들이 제시한 20% 안팎의 수치를 크게 웃도는 결과다.


노화라는 내부 엔진에 주목하다


이번 연구 결과가 과거보다 유전의 힘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분석 방식에 있다. 이전 연구들이 사고나 급성 질환으로 인한 조기 사망을 포함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노화와 직결된 사망만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다른 포유류의 수명 유전력이 대체로 50% 전후로 나타난다는 생물학적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유전자는 개인의 기대수명 범위를 설정하는 일종의 '기본 틀'이다.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80세 전후의 수명을 타고난 이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수명을 늘리더라도 타고난 상한선을 드라마틱하게 넘어서기는 어렵다. 반대로 해로운 습관을 반복한다면 기대수명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생을 마감할 위험이 커진다. 계산상 생활 습관에 따른 차이는 평균 5년 안팎으로 제시되었다.


수명 상한선과 생활 습관의 역설


학계에서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수명 상한선' 이론이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110세 이상의 초고령자 집단에서 특정 유전자 변이가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노인의학 분야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관찰 연구에 따라 흡연, 음주, 식단 등 생활 방식에 의한 기대수명 차이가 10년 이상 벌어지는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중년 이후의 건강한 습관이 노년기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사실 역시 반복적으로 입증되었다.


건강하게 사는 기간을 늘리는 기술


유전과 환경은 대립하는 요소가 아니다. 두 요소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유전자가 수명의 기본 설계도를 제공한다면 생활 습관은 그 안에서 도달 연령과 삶의 질을 조정하는 변수다. 유전적으로 장수에 불리한 조건일수록 생활 관리의 효능이 더 크게 나타날 가능성도 존재한다.


생물학적 한계를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수명 연장을 목표로 삼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 안에서 질병 없이 사는 '건강수명'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단순한 생존 기간보다 삶의 밀도가 중요해지는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유전이라는 출발선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그 틀 안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아갈지는 여전히 개인의 선택 영역이다. 주어진 설계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삶을 꾸려가는 일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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