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만이 인간이었던 도시

노동을 경멸하고 '한가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로마의 가치관

by 상식살이

한가함이라는 미덕과 노예제가 만든 기묘한 가치관


로마 경제를 지탱하는 거대한 축은 노예 제도였다. 빚을 갚지 못해 가족과 함께 감금된 채 일하는 채무자들, 간수의 채찍 아래 고통받는 황실 노예들이 제국의 밑바닥을 받쳤다. 수많은 기독교도가 이 가혹한 운명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법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노동자들이 존재했으나 이들의 삶 역시 평탄하지 않았다. 독립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을 내기 위해 척박한 땅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견뎌야 했다.


명사들의 소비가 만든 로마의 풍경


로마 제국의 운영 방식은 독특했다. 중앙정부는 지방의 세세한 행정을 명사들의 자율에 맡겼다. 지방 권력자들이 농민에게 얼마를 걷는지 간섭하지 않았고, 일정 수준의 세금만 확보되면 그들의 통치를 묵인했다. 도시의 풍경은 이들 명사 계급의 수입과 소비로 채워졌다. 지주들이 토지에서 얻은 부를 도시에서 쓰기 시작하자 그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장인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의 도시는 결국 명사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그 형태를 갖추는 공간이었다.


한가함이 곧 사생활의 초석이었던 시대


로마인에게 '한가함'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삶의 목적이자 미덕이었다. 도시 귀족들은 육체노동이 이루어지는 시골을 경멸했고, 노동자로 가득 찬 도시의 뒷골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제 손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겼다. 여가를 즐기는 능력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라고 믿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천박한 부류로 취급받았다. 노동에 대한 이토록 깊은 경멸은 노예제라는 로마 사회의 수치스러운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완전한 인간의 조건은 무위도식


고대 로마에서는 한가롭게 사는 사람만이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았다. 시민은 노예의 노동에 의지해 먹고살아야 하며, 모든 직업적인 일은 하찮은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덕망 높은 생활이란 곧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한가한 상태를 의미했다. 부자들은 일하지 않아도 될 특권을 당연하게 누렸다. 손으로 일하는 비천한 대중은 덕을 갖춘 소수 귀족의 고결한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로 여겨졌다.


노동의 가치와 존재의 증명


오늘날 우리는 '바쁨'을 성실함의 증거로 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한다. 로마인들이 노동을 경멸했던 이유는 그것이 타인에게 종속된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의 양으로 인간의 품격을 측정했다. 물론 그들의 우아한 여가가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점은 명백한 한계다.


현대인들은 로마와 정반대의 극단에 서 있다. 생산성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노동의 현장으로 내몬다. 로마인들이 예찬했던 '한가함'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노동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때, 정작 우리 자신의 '사생활'은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유란 어쩌면 생산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의 확보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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