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그 때는 오래달리기에 참여하는 것이
건강상의 문제 할 것 없이
오직 의지의 문제로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던 터라
다같이 오래달리기를 시작하는데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몇 바퀴 뛰고 나니
다리가 너무 가려워서
어쩔줄을 몰라 선생님께 가서
너무 가려워서 뛰지를 못하겠어요 라고 했더니
저도 왜 간지러운지 모르겠어요,
다리가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닌데
정말 가려워서 뛸 수가 없어요, 라고 하자
선생님이 괜찮다,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했던
선생님의 배려가 문득 생각이 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 아니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분명 선생님의 사려깊은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꾀병이라 할수도,
나를 의지박약이라 취급할수도,
여러 의심을 하거나 단언할 수 있었을텐데
선생님은 그저 가서 편히 쉬라고 하셨다.
나에게 패배자를 바라보는 눈길도 없었다.
지금이 만약 내가
내 인생으로부터 오래달리기를 하는 중이라면
정말이지 온 몸이 가렵다면
왜 가려운지조차 모르고
남들의 시선에 맞서가며
그래, 힘을 내야지, 의지를 가져야지,
가려운 건 가려운 거고
내가 도착해야 할 곳은 저 멀리 있잖아,
그럼 달려야지, 그 수 밖엔 없잖아, 라고
나를 질책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 때를 회상하며 다르게 생각하고자 한다.
그저 응원석에 앉아서
저 멀리 뛰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나는 나대로 숨을 고르며
다음을 준비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장애물 달리기에 도전하거나,
도전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쉬는 것에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달리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페이스로 호흡을 고르면 된다.
그게 오히려 오래달리기일지도.
달린다는 건 결국 발바닥의 감각이니까.
발바닥은 누구나 바닥에 닿아 있고
중력은 공평하고
풍경은 우리 모두를
함께 감싸 안고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