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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너절 Oct 08. 2021

식료품점 김너절

프롤로그. 11살 된 일개미



2021년 8월 기준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근로자 수는 약 35만 명 정도.


나는 그들에게 식료품을 판다.


2000년 우리 집은 쫄딱 망했다. IMF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98년 어느 농촌의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을 만큼 나의 아버지는 돈을 버는 수완이 좋았지만 그 이면엔 방탕함이 있어 2년 만에 집도 절도 없이 마이너스 통장을 들고 먼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의 기숙사로 온 가족이 이사를 했다. 경기도 시흥시의 시화공단이었다. 공장과 맞닿은 방에는 창문이 없어 낮에도 밤에도 형광등을 켜야했고 공장 직원이자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게된 어머니와 아버지에겐 외박도 허락되지 않았다. 산업체 복무를 하는 '삼촌'들을 관리하는 게 기숙사에 사는 조건으로 맡은 퇴근 후 아버지의 업무였다.


안산처럼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시화공단의 외국 식료품 가게들은 보통 길가에 작은 컨테이너를 두고 장사를 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공장 앞에도 하나 있었고, 공장 구내식당 일을 도맡은 고작 서른의 우리 어머니는 빈 시간 그곳에 가서 수다를 떨며 적적함을 달래곤 하셨다.


어머니에게서 가엾음과 가능성을 본 것인지 장사보단 주식으로 큰돈을 번 컨테이너의 주인 부부는 컨테이너를 떠나겠다며 매입할 능력이 없다면 월세를 내고 대신 관리를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장을 그만뒀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2-3년 간 거의 돈을 쓸어 담았다고 표현했다. 당시엔 물건도 다양하지 않았고 물건의 희소성으로 부르는 게 값이었지만 수요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위기는 찾아왔다. 대대적인 컨테이너 철거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으로 간다.


2004년, 아버지는 아직은 블루오션인 것 같다는 판단으로 부산에 매장을 차렸다. 안산은 그때도 지금처럼 포화상태였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2005년 사춘기에 접어든 나에게 어머니는 조심스레 부산으로의 가족 이사를 제안했다. 1년이 지났으니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가족은 같이 살아야지.라고.


어머니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매장은 자리를 잡긴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자리 잡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까 말한 아버지의 방탕함이 문제였다. 장사는 잘 되는데 네 가족이 살 전셋집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우리는 직접 입주 청소를 해가며 공동묘지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기 시작했다.


가계는 빠른 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근면성실의 아이콘인 어머니가 버티고 있으니 드디어 돈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월세에서 전세를 건너뛰고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샀다. 안정을 찾자마자 아버지의 방황이 함께 시작된 것이 문제지만.


수능을 칠 무렵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며 돈과 신뢰를 갉아먹는 가장은 필요 없다는 판단이었다.


수능을 친 뒤 넘쳐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랐던 나는 카운터 옆에 앉아 잔심부름을 하기 시작했고,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카운터를 지키게 되었다.


정시 원서를 쓸 때 장사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외국어 전공을 권유한 것도 어머니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선택을 몹시도 후회했다. 대학 4년, 그리고 지금까지 11년간 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의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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