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스 - 오므오트편

일상 시리즈

검은색이 주는 분위기에는 힘이 있다.

한국의 미라고 하면 역시 수묵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짙은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곧은 기개를 표현한 듯한 인테리어에서 강렬함과 절제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오므오트의 경우 이번 3월 중순까지 십장생의 마지막을 선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맛본 주제는 십장생 중 구름, 사슴, 불로초, 산이었다.


막이 올라가고, 나는 이 주제를 어떻게 차에 담아냈을지 기대가 되었다.


먼저 웰컴티로 감잎차가 나왔다.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데, 이는 발효차의 고소함과는 결이 조금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맛은 살짝 고소해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곡물차를 연상케 했으나, 감 특유의 떫은맛으로 마무리되었다. 떫은맛이 연해 거부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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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 첫 번째 주제는 구름이었다.

향을 먼저 맡게 한 뒤 들어간 재료를 추측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브 향이 짙게 느껴졌다.

답은 쑥과 로즈마리(쑥로)였다. 로즈마리와 쑥은 각자의 존재감이 뚜렷한 재료라고 생각하는데, 두 재료의 조합이 깔끔해 인상 깊었다. 쑥의 깊은 맛에 로즈마리의 청량함이 더해져 신선하게 다가왔다. 해당 차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겼다. 잔 주위로 빛 반사가 일렁이며 구름을 형상하는 듯 보였다.

다과로는 모나카가 자개함에 담겨 제공되었다. 자개함에 수놓인 구름이 오색빛을 띠었다. 모나카의 경우 맛은 좋았으나 특유의 건조함이 살짝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번째 주제는 사슴이다.

콩과 건빵으로 만든 묽은 콩죽으로 입가심을 한 뒤 차가 나왔다.

이번에는 유자홍차였다. 남해 토종 유자의 속을 판 후 그 안에 보성 홍차를 넣어 1년간 숙성시킨 것이라고 한다.

사슴의 뿔을 표현한 찻잔과 숙우에서 느껴지는 질감에 우선 매료되었고, 유자의 깊은 시트러스 향에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유자의 톡 쏘는 맛과 사슴 뿔의 모양새가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자는 통일신라 시대에 중국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수려한 장식의 신라 금관이 사슴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통일신라가 유자와 사슴을 관통하는 큰 주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차는 역시 분위기로 마신다고 했던가.

그도 그럴 것이 이 맛은 절대 일상의 속도 속에서는 즐길 수 없을 것 같다.


차는 쉽지 않다.


세 번째 주제는 불로초이다.

차는 ‘도화’로, 도라지와 캐모마일, 홍차가 배합된 것이었다. 묵직한 맛에 맞게 찻잔 역시 궤를 같이했다.

찻잔을 받기 전 진행자가 찻잔을 둘러싼 먼지 같은 물체에 불을 붙여 그것이 타오르도록 하는 작은 쇼를 보여주었다. 부적을 태워 액운을 막는 무속 신앙에서 영감을 받아, 불로초를 상상했을 때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타는 물체를 보며 진시황의 불로불사에 대한 집착과 그 덧없음을 떠올렸다.

차에서 풍기는 다크초코 향이 매혹적이었다. 맛은 도라지 특유의 풍미 덕분에 약재를 다린 물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긴 불로초를 상상해보니 단맛보다는 인삼 같은 씁쓸함이 훨씬 어울리기는 한다.

다과는 흑임자 약과였는데 생김새가 밤과 같아, 차라리 밤정과가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주제는 산이다.

차의 이름은 ‘믹스티’로, 쑥가루와 말차가루의 만남을 담았다. 운이 좋게도 말차 가루는 카페인이 많아 말차의 비율을 적게 하셨다고 했다.


쑥가루의 입자가 거친 편인데, 오므오트만의 공정을 통해 곱게 갈아 이 차를 선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진행자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내 뒤에 놓인 겸재 정선의 산수화는 가을의 금강산을 표현한 것으로, 이에 영감을 받아 짙은 녹색에 붉은색이 가미된 찻잔을 사용했다고 한다. 산이라는 주제답게 수색은 깊은 산중의 적막함을 떠올리게 했다. 맛은 산에 봉우리가 있는 것처럼 단맛의 길을 올라가다 쓴맛이 봉우리처럼 탁 치고 지나가며, 다시 씁쓸한 단맛으로 내려오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이 달달함이 끝에는 느끼함으로 남아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에서 나는 재료를 엄선해 선보인 차와 다과에서 하나의 한국화 작품을 본 것 같았다. 다만 해당 주제를 차와 다과 자체에만 담기보다는 다구까지 포함한 모든 것에 포괄적으로 담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식(食)과의 연관성을 해석해 보려던 초반의 시도를 포기하고, 그저 전체의 그림을 따라가며 그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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